잊기 싫은 책과 문장 66

기도와 영성, 그리고 기독교윤리

대학원에서 기독교윤리학을 1학기 공부한 이후, 지금 나의 관심은 '삶의 자리(Sitz im Leben)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형체도 없이 먼지처럼 보이긴 하나 잡을 수 없는 형이상적인 언어가 아니라 흙 먼지 가라앉은 땅바닥에서 학문하는 것이, 기독교윤리의 제 자리일 것이란 생각이 문득 스쳐간다. 그렇다. 처음 내가 기독교윤리를 하기로 결심한 까닭도 결코 윤리적이어서가 아니었다. 어디인지 분간할 수조차 없는 어두움의 심연에서 없는 양심에 조금이라도 가책을 덜 느끼고 싶어서 시작한 공부였다. 겉 보기와는 다르게 내 인생은 보잘 것 없는 고철과 같다. 코팅한 것처럼 윤기 있는 것처럼 보이나 실제로는 녹이 슬어 내구성 떨어진 값어치 없는 고철일 뿐이다. 사람은 속여도 하나님과 나 자신은 속이지 못 하리라..

자본주의 문화와 노동자

자본주의의 주요 특징은 돈이 더 많은 돈을 버는 데 이용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 돈은 시장에 팔 수 있는 상품에 투자되거나 그런 상품을 만드는 공장에 투자되어야 한다. 그러나 우리는 대개 돈 자체가 돈을 번다거나 돈이 자기 생명력이 있는 것처럼 말한다. 달러화 하락을 '축 늘어진 달러', 현금의 유출입을 '현금 흐름', 돈을 투자하는 것을 '돈에게 일을 시키다'라고 표현한다. 신문이나 방송 뉴스에서는 '기업 실적이 급격하게 성장했다'거나 '이자율이 오르고' 있다고 말한다. 심지어 우리는 공장을 '돈이 자라는grow 식물plant'이라고 표현하기까지 한다. 달리 말하면, 이와 같은 말에는 자본이 본디 스스로 확장하는 특징을 가졌다는 생각이 담겨 있음을 의미한다. 자본이 스스로를 끊임없이 재생산하..

루터와 재침례파의 칭의와 성화 이해

후브마이어는 믿음으로 얻는 의인에 관한 루터의 생각을 그대로 받아들이지는 않았고 말씀의 실천을 내면이 아니라 생활 공동체(Lebensgemeinschaft)에서 찾았다는 점에서 루터와 달랐다. (...) 그러나 후브마이어를 비롯한 재침례파는 루터가 믿음에 관한 성서의 가르침을 재발견한 것과 달리 "성화(聖化, Heiligung)로의 성서적 요청"을 재발견했다. 신앙을 내면의 변화로 본 것이 아니라 삶 속에서 실천해야 할 것으로 보았고 의인과 성화의 이론적 체계를 형성하려고 시도한 대신, 의인과 성화를 "삶의 개선(Verbesserung des Lebens)"으로 수렴하려고 노력했다. ​​ - 장수한, "사회의 역사로 다시 읽는 독일 프로테스탄트 교회의 역사", 47.

성경에 대한 공동체적 해석의 필요

리처드 B. 헤이스는 그의 책, "신약의 윤리적 비전" 중에 다음과 같이 스탠리 하우어워스의 글을 소개한다. ​​​​대부분의 미국 그리스도인들은, 의무는 아니라 할지라도, 성경을 읽을 권리가 있다고 가정하고 있다. 나는 그 가정에 도전하고자 한다. 교회가 미국에 있는 개인 그리스도인들의 손에서 성경을 빼앗는 것보다 더 중요한 과제는 없다. 더 이상 성숙한 연령에 도달했다고 믿어질 때, 그 아이들에게 성경을 주지 말자. (...) 차라리 그들과 그들의 부모들에게 말하자. 그들이 혼자서 성경을 읽도록 장려하기에는 너무 타락한 습관에 사로잡혀 있다고. -스탠리 하우어워스하우어워스의 말에 절대적으로 공감한다. 개인의 손에서 성경을 빼앗지 않는 한, 성경은 바르게 해석될 수가 없다.​ 이미 망할 미국 남부의 복음..

스탠리 하우어워스를 읽으며

근래 스탠리 하우어워스의 책을 읽고 있습니다. 를 시작으로 을 읽었고, 지금은 을 보는 중입니다. ​ 저는 종종 스스로를 보수주의자로 말하고 다녔는데, 실은 저와 같은 부류는 정치적/신학적 자유주의자에 가깝다는 그의 지적에 수긍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자유주의에 대한 하우어워스의 문제의식이 상당히 공격적이라는 점입니다. 특히나 이 던진 화두는 바르트가 자유주의 진영에 던진 그것과 비슷하지 않을까 비교 짐작해볼 만한 것이었습니다-이론적으로 어리석고 둔감할뿐더러 자유주의 우파(?)에 속한 제가 받은 느낌이었으니, 자유주의 진영 좌측에 깊숙이 계셨던 분들이라면 더욱 충격적이리라 상상해봅니다-. 하우어워스의 공격적 글쓰기에 (자신도 없는) 논리 방어를 해보고 싶은 생각 이전에, 일말의 종교적 신심이..

성경 윤리란 무엇인가?

스탠리 그랜츠는 그의 책 "기독교 윤리학의 토대와 흐름"에서 성경 윤리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의 이야기는 성서 내러티브가 지시하는 성품윤리로 나아간다. 대부분의 그리스도인은 기독교 윤리 전통이 성경에 그 기초를 둔다는 데 동의할 것이다. 그런데 이 말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인가? 성경 윤리란 무엇인가? 우리는 어떻게 성경에서 현재의 삶의 문제로 넘어올 수 있는가? 우리는 제일 먼저, 성경에서 나오는 인간 행동에 대한 교훈, 원칙, 법규 등이 성경 윤리를 구성하는 요소라고 생각할 수 있다. (중략) 다만 여기서는 성경이 삶과 관계하는 방식을 그렇게만 생각하는 것은 지나친 단순화라는 것이 기독교 윤리학자들의 중론임을 밝혀 둔다. 최근 몇 년 간 다양한 입장의 학자들은 성경이 어쨌든 간에 이야기(nar..

십자가 기사의 에토스

십자가 기사는 비폭력 저항이라는 창조적 실천 방식의 중요성을 독자들에게 일깨워준다. 예수의 십자가는 하나님 나라를 이루는 방법과 과정이 비폭력적 저항의 성격을 가져야 한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이것은 십자가와 관련하여 위에서 언급한 것의 구체적 내용이라 할 수 있다. 당대 사회 질서에 대한 선택적 부정은 '저항'으로, 선택적 긍정은 '비폭력'으로 나타난다. 예수는 당대 사회의 악에 대해 저항의 입장을 분명히 하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악을 러딘하기 위해서 폭력을 쓸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는 폭력적 저항을 포기하고 폭력을 당하는-죽기까지 순종하는-저항의 저세를 취하셨다. 당시 대중들이 갈망하던 메시아적 폭력 즉 "구원하는 폭력"을 예수께서 끝까지 사용하지 않자..

예수의 삶의 궤적: 성육신, 십자가, 부활

예수의 성육신, 십자가, 부활을 오직 구원론적 관점에만 초점을 두고 이해하는 데는 아쉬움이 있다. 우리와 같이 인간이 되신 하나님은 참된 인간의 삶이 무엇인지, 인간의 참된 삶의 궤적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몸소 보여주신 점을 간과하는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성육신, 십자가, 부활을 예수의 구체적인 삶(의 모범)에서 분리시키면, 앙상하게 추상화된 신조만 남게 됨으로써, 그것들 속에 담겨 있는 윤리적 삶의 에토스를 사장시킬 가능성이 많다. 신조에 대한 믿음으로는 '신자'를 만들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제자'를 만들기는 어렵다. 그 결과 신자와 제자의 분열 현상이 나타나게 된다. 제자가 아닌 신자의 삶에서 예수 윤리가 묻어난 삶을 기대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셰인 클레어본(Shane Claiborne)이 지적한..

덕 윤리에 대하여

우리는 의지뿐만 아니라, 덕을 향하는 본성적은 능력을 소유하고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바로 이것이 우리로 하여금 덕스러운 사람이 될 수 있게 해주는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이 본성적인 능력은 가능태(잠재성)일 뿐이다. 그 잠재성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즉 가능성을 현실성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의지를 적절하게 사용해야 한다. 즉 우리의 의지가 이성적이고 도덕적인 원리에 따라 옳은 행동을 하도록 우리를 인도할 수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옳은 행동이란 올바른 목적을 위하여 올바른 범위 내에서 올바른 방식으로 올바른 사람에게 올바른 것을 행하는 것으로 보았다. 그러나 한 번 올바른 행동을 했다고 해서 덕스런 삶이 창출되는 것은 아니다. 우리의 의지가 영원히 자유로운 것도 아니다. 그보다는 오랜 시간에 걸쳐서 형성해..

요더와 레비나스

어제 늦은 저녁에, 날 것 그대로의 졸업논문을 교수님께 메일로 보내드렸습니다. 논문은 기독교 윤리학에 관한 것이며 신학자와 철학자의 윤리를 비교연구한 것입니다. 오늘은 다른 공부를 하면서 잠깐 다른 생각이 들었습니다. 뒤늦게 영감이 떠올라 후회하는 것은 설교만 아니라 공부에서도 마찬가지인 듯 합니다. 가공되어야 하는 생각이지만, 1. 지금 우리의 터전은 그다지 평화롭지 않은 세계인 것 같습니다. 국가의 폭력, 레지스탕스의 게릴라식 테러, 전쟁과 내전, 불의한 경제와 신뢰할 수 없는 정치 지도력, 재생되지 않는 자연의 문제 앞에 우리는 노출되어 있습니다. 2. 표현되거나 이루 말할 수 없으나 일련의 고통에 저는 상당히 괴로웠던 듯 합니다. 사랑 없는, 평화롭지 않은 세상살이의 무게가 컸던 것 같습니다. 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