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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개척과정(1)

habiru 2023. 9. 14. 21:33

지난달, 목사 안수를 받고 나서 교회 개척을 준비한다는 이유로 한가로운(?)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교회와 목회에 관해 이런저런 생각을 하고, 누군가와 대화도 하고, 책도 읽지만, 시쳇말로 무언가 꽂히는 필(feel)이 없습니다. 하이데거 선생님은 남들이 마땅히 그래야 한다고 생각하는 삶의 방식이 아닌, 자기 자신에게 고유한 것을 자각하여 결단을 내릴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것이 중요하다고 했습니다. 실로 나는 누구여야 하고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결단할 수 있는 권한을 양도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의 가르침을 따라 저도 남들이 으레 정의하는 목사가 되지 않고, 제게 주어진 소명이라는 ‘본래성’과 ‘고유성’ 안에서 어떤 목사가 되어야 하는지 고민하려고 합니다. 

여기까진 좋습니다만, 문제가 있습니다. 아직 진정한 목사가 아니라는 자각 때문입니다. 목사직이 저절로 생기는 유아독존적 소명이 아닌, 목사 자신을 둘러싼 회중과 관계 맺고 살아가는 ‘교회-내-존재’ 소명이라는 생각이 들어서입니다. 다시 말해, 목사에게는 목양할 회중, 곧 교회가 있어야 합니다. 세상에서 가장 작은 교회를 부부라고 생각하는 제게 가정은 더없이 소중한 교회입니다만, 언제까지나 가정 내에서는 삶을 함께하는 동반자가 되고 싶을 뿐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지금 목회 철학, 목회 계획을 세우는 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그 효용성에 대해 의구심이 듭니다. 따라서 조금 더욱 힘을 빼고 생각하기로 했습니다. '실체 없는 목회'에 대해 무언가를 진지하게 계획하기보다는, 우리 가정과 우리의 현실에 뿌리내린 예배를 드리자고 말입니다. 기본적인 골격은 다음과 같습니다. 

1) 가정교회입니다.
교회 개척을 하더라도 가정에서 예배를 드릴 계획이다 보니 자연스레 가정교회의 형태가 될 것입니다. 그러나 어쩌다가 예배를 함께 드리는 이들이 늘어나더라도 어느 정도는 가정교회의 모양을 유지하고 싶습니다. 성경에서 "돕는 배필"로서 배우자는 "에제르 케네그도"(עזר כנגדו), 직역하면 "마주하는 것으로부터의 구원"이라고 합니다. 즉, 구원을 처음 맛보는 곳은 '가정'입니다. 그 점에서 서로에게 구원이 되는 가정적 교회가 되었으면 합니다. 서로서로 인격적 관계를 맺을 수 있는 수준의 몸집, 프로그램과 시스템으로 운영되지 않는 유기적인 모임이 되면 더없이 좋겠습니다. 

2) 매 주일 식사를 함께하는 교회입니다.
누군가는 말하길, "빵은 매일의 양식을 의미한다. 함께 먹는 빵은 경제적 나눔이다. 그것은 단순히 상징적인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 가족으로 음식을 함께 먹음으로써 경제적인 연합의 모임을 점점 확대해 나가는 것이다. (...) 간단하게 말해서, 성찬식은 하나의 경제적인 행동이다. 빵을 함께 나누는 것을 올바로 실행하는 것은 경제적인 윤리와 관련된 문제이다."라고 했습니다(J. H. Yoder, <교회 그 몸의 정치>, 김복기 역, 92.). 성찬 혹은 주의 만찬을 성례전적 '상징'이 아니라 성례전적 '실재'로 신앙하고자 합니다. 교회 안에서 진정한 코이노니아, 경제적 나눔과 보살핌이 이루어졌으면 좋겠습니다.
 
3) 동물과 함께 예배드리는 교회입니다.
이는 신학적인 이유보다 저희 가정이 겪고 있는 어려움에 기인합니다. 예배를 드리면서도 집에 강아지를 두고 예배당에 가는 게 못내 마음에 걸릴 때가 많았습니다. '반려'라는 수식어를 붙여 부르는 동물 친구와 보내는 시간이 퇴근 이후 하루에 고작 4~5시간뿐인데, 주말을 함께하는 건 당연하다고 생각합니다. 동물 친구에겐 사람 친구가 세상의 전부일 텐데, 예배 시간에 동물 친구를 배제하는 게 좋지 않아 보였습니다. 예배를 함께 드리는 데에 큰 문제가 없다면, 얼마든지 함께 예배드릴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교회가 노펫존, 노키즈존 같은 배제의 공간이 아닌, '노아의 방주'와 같은 환대의 공간이 되길 바랍니다.

4) 아나뱁티스트적 신앙을 지향하되, 고교회의 신앙 유산도 선택적으로 긍정하는 침례교회입니다.
변증법적 긴장 속에서 창조적으로 두 전통을 수용하고자 합니다. 보편교회, 개혁교회의 전통을 비판적으로 계승하면서 아나뱁티스트적 제자도와 공동체, 평화 유산을 지켜나가는 것입니다. 언젠가 존 스토트(J. R. W. Stott) 신부님이 당신이 성공회에 남은 이유를 변증 했던 내용이 기억이 납니다("나는 왜 여전히 영국 성공회 교인인가?", <살아있는 교회>, 신현기 역, 185-97). 그는 열정적인 복음주의자들이 성급하게 교단을 떠나지 말라고 촉구하며, 포괄성을 이유로 들어 설명했습니다. 저는 그의 변증을 선택적 긍정과 선택적 부정으로 이해하였습니다. 제가 속한 침례교회 전통 안에서 타 교파, 타 교단의 신앙 유산을 선택적으로 긍정하고, 선택적으로 부정하면서 하이브리드 신앙인이 되는 것입니다. (재)침례교회쯤으로 정의할 수 있겠습니다. 과거나 미래에 모두 열려 있는 교회입니다. 

(결론) 내년부터 저희 가정에서 예배를 드리고자 합니다. 혹시 주변 지인 중에 제주시에서 함께 예배드릴 분이 있다면 저희 가정과 연결해 주시고 추천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위치는 제주시 삼양동입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