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 8

구도자 선생님께(1)

잠시 제 소개를 드리고 싶습니다. 저는 어린 시절 기독교 가정에서 태어나 자랐습니다. 그 덕분에 자연스럽게 기독교 중심의 세계관과 문화를 습득하게 되었고, 이로 인해 선생님과는 다른 배경에서 이야기를 나누게 될 것임을 이해해 주셨으면 합니다. 사람마다 살아온 세상이 다르기 때문입니다.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종교, 더 나아가 본질적인 영적 생활에 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것은 기독교에만 국한되지 않았습니다. '영적'이라는 개념은 다양하게 정의될 수 있지만, 저에게는 나를 구성하는 정신의 본질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성인이 된 이후에는 기독교 교회에서 정한 규범을 넘어 진리가 무엇인지에 대한 호기심을 가지고 살아왔습니다. 여러 곳을 탐색하고, 성서에서 말하는 진리를 연구하기도 했습니다.이제는 ..

일상 2024.08.13

루터와 재침례파의 칭의와 성화 이해

후브마이어는 믿음으로 얻는 의인에 관한 루터의 생각을 그대로 받아들이지는 않았고 말씀의 실천을 내면이 아니라 생활 공동체(Lebensgemeinschaft)에서 찾았다는 점에서 루터와 달랐다. (...) 그러나 후브마이어를 비롯한 재침례파는 루터가 믿음에 관한 성서의 가르침을 재발견한 것과 달리 "성화(聖化, Heiligung)로의 성서적 요청"을 재발견했다. 신앙을 내면의 변화로 본 것이 아니라 삶 속에서 실천해야 할 것으로 보았고 의인과 성화의 이론적 체계를 형성하려고 시도한 대신, 의인과 성화를 "삶의 개선(Verbesserung des Lebens)"으로 수렴하려고 노력했다. ​​ - 장수한, "사회의 역사로 다시 읽는 독일 프로테스탄트 교회의 역사", 47.

스탠리 하우어워스를 읽으며

근래 스탠리 하우어워스의 책을 읽고 있습니다. 를 시작으로 을 읽었고, 지금은 을 보는 중입니다. ​ 저는 종종 스스로를 보수주의자로 말하고 다녔는데, 실은 저와 같은 부류는 정치적/신학적 자유주의자에 가깝다는 그의 지적에 수긍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자유주의에 대한 하우어워스의 문제의식이 상당히 공격적이라는 점입니다. 특히나 이 던진 화두는 바르트가 자유주의 진영에 던진 그것과 비슷하지 않을까 비교 짐작해볼 만한 것이었습니다-이론적으로 어리석고 둔감할뿐더러 자유주의 우파(?)에 속한 제가 받은 느낌이었으니, 자유주의 진영 좌측에 깊숙이 계셨던 분들이라면 더욱 충격적이리라 상상해봅니다-. 하우어워스의 공격적 글쓰기에 (자신도 없는) 논리 방어를 해보고 싶은 생각 이전에, 일말의 종교적 신심이..

성경 윤리란 무엇인가?

스탠리 그랜츠는 그의 책 "기독교 윤리학의 토대와 흐름"에서 성경 윤리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의 이야기는 성서 내러티브가 지시하는 성품윤리로 나아간다. 대부분의 그리스도인은 기독교 윤리 전통이 성경에 그 기초를 둔다는 데 동의할 것이다. 그런데 이 말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인가? 성경 윤리란 무엇인가? 우리는 어떻게 성경에서 현재의 삶의 문제로 넘어올 수 있는가? 우리는 제일 먼저, 성경에서 나오는 인간 행동에 대한 교훈, 원칙, 법규 등이 성경 윤리를 구성하는 요소라고 생각할 수 있다. (중략) 다만 여기서는 성경이 삶과 관계하는 방식을 그렇게만 생각하는 것은 지나친 단순화라는 것이 기독교 윤리학자들의 중론임을 밝혀 둔다. 최근 몇 년 간 다양한 입장의 학자들은 성경이 어쨌든 간에 이야기(nar..

십자가 기사의 에토스

십자가 기사는 비폭력 저항이라는 창조적 실천 방식의 중요성을 독자들에게 일깨워준다. 예수의 십자가는 하나님 나라를 이루는 방법과 과정이 비폭력적 저항의 성격을 가져야 한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이것은 십자가와 관련하여 위에서 언급한 것의 구체적 내용이라 할 수 있다. 당대 사회 질서에 대한 선택적 부정은 '저항'으로, 선택적 긍정은 '비폭력'으로 나타난다. 예수는 당대 사회의 악에 대해 저항의 입장을 분명히 하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악을 러딘하기 위해서 폭력을 쓸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는 폭력적 저항을 포기하고 폭력을 당하는-죽기까지 순종하는-저항의 저세를 취하셨다. 당시 대중들이 갈망하던 메시아적 폭력 즉 "구원하는 폭력"을 예수께서 끝까지 사용하지 않자..

예수의 삶의 궤적: 성육신, 십자가, 부활

예수의 성육신, 십자가, 부활을 오직 구원론적 관점에만 초점을 두고 이해하는 데는 아쉬움이 있다. 우리와 같이 인간이 되신 하나님은 참된 인간의 삶이 무엇인지, 인간의 참된 삶의 궤적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몸소 보여주신 점을 간과하는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성육신, 십자가, 부활을 예수의 구체적인 삶(의 모범)에서 분리시키면, 앙상하게 추상화된 신조만 남게 됨으로써, 그것들 속에 담겨 있는 윤리적 삶의 에토스를 사장시킬 가능성이 많다. 신조에 대한 믿음으로는 '신자'를 만들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제자'를 만들기는 어렵다. 그 결과 신자와 제자의 분열 현상이 나타나게 된다. 제자가 아닌 신자의 삶에서 예수 윤리가 묻어난 삶을 기대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셰인 클레어본(Shane Claiborne)이 지적한..

정교 분리에 대해서

1. 정교 분리의 신념 흔히 우리는 종교인은 사회와 직결되지 않은 상태에서 살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종교인은 사회의 제반 갈등과 문제들에 직접 개입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2. 정교 분리의 불합리성 예수의 삶에 비추어 볼 때, 이러한 생각은 잘못된 것이다. 하나님의 메시야 예수는 결코 사회를 떠나지 않으며, 사회적 갈등의 문제들을 망각하지 않는다. 3. 그리스도인들과 교회의 숙명 따라서 그리스도인들과 교회는 "종교적 존재"인 동시에, 철저히 "사회적 존재"이어야 한다.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이 사회 안에서, 사회의 문제들과 함께 살아야 한다. 이와 동시에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출발하여 이 사회의 문제들에 대한 해결의 길을 제시함으로써 하나님의 주권을 세우는 "사회적 존재"이어야..

선악이란 무엇인가?

나는 평범한 기독교 배경의 가정에서 성장했다. 그래서 현실의 문제에 있어서 늘 피안의 세계로 도피하고픈 욕망 속에 있었다. 정의, 사랑과 같은 종교적 언어로 치환되는 문제에 있어서는 더욱 그러했다. 특별히 "선과 악"에 관한 담론에서는 자연스럽게 알레고리하게 이해하는 경향이 짙었다. 어릴 때, 절대 선(善)과 절대 악(惡)은 형이상의 세계에서 늘 충돌하고 있었다. 절대 선인 하나님과 절대 악인 사탄의 싸움 구도는 종교 담론만 아닌, 눈으로 보이진 않지만 근본적인 이원론적 세계관으로 적절하게 받아들이고 있었다. 일상에서 일어나는 좋지 않은 일들을 마주할 때는 악으로 재단하고 그것을 뭉개려고 했다. 반대로 좋은 일들을 대면할 때는 선으로 단정 짓고 하나님께 감사를 드렸다. 그러나 철학을 공부하며 사변적 세계..

일상 2016.06.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