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사, 제주교회, 반려동물 444

쿵, 쿵, 쿵, 쿵. 고단한 밤

엊그제, 술집 화장실에서 마주친 중년 남자의 모습이 아직도 선명합니다. 소변기 앞에 서 있던 그는, 깊은 한숨과 함께 머리를 연신 벽에 박았습니다. 쿵, 쿵, 쿵, 쿵. 둔탁한 소리가 화장실 벽을 타고 메아리칠 때마다 그의 괴로움이 고스란히 전해져 왔습니다. 술에서 깨기 위함이었을까요, 아니면 괴로워서였을까요.  하지만 저는 알았습니다, 그 소리에는 삶의 무게가 고스란히 담겨있다는 것을. 반쯤 감긴 그의 눈꺼풀은 무척이나 피곤해 보였고, 충혈된 눈동자가 그 사이로 조금씩 보였습니다. 그의 벌게진 얼굴에는 주름이 깊게 패여 있었고, 한숨 섞인 그의 숨소리에는 자조가 묻어났습니다.   문득 20년 전 우리 아버지가 떠올랐습니다. 늦은 밤, 거나하게 취해 돌아오시던 아버지도 이런 표정을 지으셨겠지요. 당신의 ..

일상 2024.12.23

왜 땅콩이는 중성화 수술을 하지 않았어요?

저희 가정은 중성화 수술을 하지 않은 5세 수캐 땅콩이와 함께 살고 있습니다. 주변에서 왜 중성화 수술을 하지 않느냐고 궁금해하시는 분들이 있습니다. 오래전부터 땅콩이의 중성화 수술에 대해 아내와 많은 대화를 나누었고, 때로는 얼굴을 붉히며 다투기도 했습니다. 땅콩이처럼 예민한 개에게는 중성화 수술이 도움이 된다는 훈련사의 조언도 들었지만, 그럼에도 중성화 수술을 하지 않았던 이유는 건강 염려(호르몬・체중 변화 등)와 동물의 자기 결정권 때문이었습니다.  중성화는 수의학 용어로 'de-sexing'이라고 하는데, 말 그대로 성별을 제거한다는 뜻입니다. 누군가 건강상의 이유를 들어 사람의 생식기 일부를 제거한다고 상상해 보십시오! 끔찍한 일입니다. 누군가에게는 꼭 필요한 수술일 수 있지만, 반드시 필요한 ..

일상 2024.12.18

30대 맞벌이의 제주 이주기: 제주 이주부터 정착까지

제주에 내려오기 전, 아내는 평범한 회사원이었습니다. 대학을 졸업한 이후, 10년 넘게 줄곧 일한 아내는 지칠 대로 지쳐 있었습니다. 여건상 아내는 가계를 지원해야 했기에 자신이 바라는 대로 자유롭게 살지 못했습니다. 그와 달리 저는 대학 동기들이 취업전선에 뛰어들 때, 대학을 5년이나 더 다니면서 자유를 누렸습니다. 그래서 늘 아내에게 미안하고 안쓰러운 마음이 있었습니다. 가끔씩 아내에게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살기를 바란다'고 말했던 이유는 그런 감정 때문이었습니다. 나이를 먹을수록 그런 말들이 공기 중에 흩어지는 무책임한 소리에 불과하다는 걸 모르진 않았지만, 그렇게라도 말하며 안쓰러움을 누그러뜨렸습니다. 그러나 순간의 진심 어린 말들과 달리 이제 막 사회에 적응하던 저는 아내에게 가계를 책임지겠..

일상 2024.12.17

제품인가, 작품인가

αὐτοῦ γάρ ἐσμεν ποίημα그러므로 우리는 그의 작품입니다.  어린 시절, LG에서 엑스캔버스(XCanvas)라는 이름으로 TV가 출시된 적이 있습니다. 2010년까지 사용된 TV 브랜드이지만, 15년이 지난 지금도 기억에 남아 있을 정도로 좋은 이름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아직 제 기억 속에 엑스캔버스는 웅장하고 고급스러운 느낌이 듭니다. 삼성 PAVV도 그에 못잖게 좋은 TV브랜드였지만, 제 기억 속에 엑스캔버스 TV는 명품의 상징으로 남아 있습니다. 저희 가정에서 사용하는 제품들은 자주 소비되고 버려지는 게 많습니다. 쉽게 닳아 해지기 때문입니다. 작년에 1만 원에 구입했던 티셔츠는 1년도 되지 않아 목이 늘어나서 못 입습니다. 그러나 10년이 지나도 버리지 않고 입는 브랜드 티셔츠도 있..

가장 중요한 건(ουσία) 눈에 보이지 않아.

공주시 반포면 상신리, 계룡산 북쪽 계곡에 자리 잡은 마을입니다. 상신마을에는 은사님이신 J 교수님이 살고 계십니다. 정년은퇴까지 J 교수님은 학자로서의 업(業)에 진지하셨고, 은퇴 이후에도 독립출판사를 운영하며 기획자와 편집자, 번역가로서 충실하게 살고 계십니다. 교수님 댁에 방문할 때마다 직접 로스팅해서 내려주시는 커피는 고소한 풍미와 향긋한 냄새가 일품이었습니다. 한 모금의 커피를 삼킬 때마다 콧구멍으로 전해지는 온기와 향기를 잊을 수 없습니다.   몇 년 전 어느 날이었습니다. 교수님은 제자들에게 천진난만한 모습으로 세계 곳곳에서 번역된 도서를 보여주시며 말씀하셨습니다. 각국 언어로 번역된 도서전을 열고 싶다고 말입니다. 그러시면서 제게 그리스어 역본의 일부를 보여주셨습니다. 한참이나 지난 일..

어떻게 사람의 마음을 얻을 수 있을까

이따금씩 마음 깊은 곳에서 꺼내두고 묻는 말이 하나 있습니다. "어떻게 사람의 마음을 얻을 수 있을까?"  정호승 시인의 「윤동주 시집이 든 가방을 들고」의 일부분입니다. 익숙한 질문인데도 늘 제대로 답할 수가 없어 우물쭈물 대고는 합니다. 한동안 이 말을 핸드폰에 저장해 두고서 곱씹고는 했습니다만, 시원하게 대답 한번 할 수가 없었습니다.   지난주, 친정으로 가는 아내에게 꾸지람을 들었습니다. "자기는 내 말을 왜 이렇게 자주 끊어? 그럴 때마다 기분 나쁜데 몇 번이나 참고는 해. 정말 안 좋은 습관이야." 가끔 반려견 땅콩이도 무언(無言)의 눈빛으로 나무라는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너는 왜 네 생각만 해? 너무 이기적인 것 아니야?"   그럴 때면 부끄러운 마음에 어깨가 쪼그라듭니다. 누군..

일상 2024.12.10

누가 살아 남겠느냐

[말라기 3:1-4, 새번역]1 "내가 나의 특사를 보내겠다. 그가 나의 갈 길을 닦을 것이다. 너희가 오랫동안 기다린 주가, 문득 자기의 궁궐에 이를 것이다. 너희가 오랫동안 기다린, 그 언약의 특사가 이를 것이다. 나 만군의 주가 말한다.2 그러나 그가 이르는 날에, 누가 견디어 내며, 그가 나타나는 때에, 누가 살아 남겠느냐? 그는 금과 은을 연단하는 불과 같을 것이며, 표백하는 잿물과 같을 것이다.3 그는, 은을 정련하여 깨끗하게 하는 정련공처럼, 자리를 잡고 앉아서 레위 자손을 깨끗하게 할 것이다. 금속 정련공이 은과 금을 정련하듯이, 그가 그들을 깨끗하게 하면, 그 레위 자손이 나 주에게 올바른 제물을 드리게 될 것이다.4 유다와 예루살렘의 제물이 옛날처럼, 지난날처럼, 나 주를 기쁘게 할 것..

MVP 판매

지난 3일 밤, 계엄령이 발동되었고 다음 날 새벽에 해제되었습니다. 오늘까지 '123 비상계엄' 사태부터 사흘이나 지났지만 여전히 하루 종일 실시간 뉴스를 틀어놓고 귀를 기울이고 있습니다. 2차 계엄에 대한 뉴스까지 나오다 보니 도무지 일이 손에 잡히지 않습니다. 오늘도 여러 인사의 기자회견을 수차례 챙겨보았습니다. 어제 오늘, 광장에 나서지 못한 게 못내 맘에 걸립니다. 추운 날씨에 광장에 모인 시민들에게 빚을 진 것만 같습니다. 이따금씩 스피노자의 말을 곱씹을 때가 있습니다. "내일 세상이 무너져도 나는 오늘 한 그루의 사과나무를 심겠다." 실제로 이 말이 스피노자의 명언인지 궁금하지 않습니다만, 철학자가 일상을 꾸준하게 유지하는 이유와 까닭은 궁금합니다. 결국 그 이유는 깨닫지 못했지만, 일상을 진..

구제주 탑동 일대 탐방

제가 살고 있는 제주시는 크게 신제주와 구제주로 나뉩니다. 신제주는 현대적인 신시가지, 구제주는 옛 정취가 묻어나는 구시가지로 볼 수 있는데요. 다른 도시의 원도심처럼 구제주도 경기 침체의 여파로 상권이 위축되는 문제를 겪고 있습니다😢 하지만 2010년대 중반부터 구제주의 원도심 일대가 도시재생사업을 통해 점차 활기를 되찾고 있습니다😎 옛 제주기상청 건물이 창업지원 공간으로 탈바꿈한 제주창조경제혁신센터의 W360, 워케이션 공간으로 입소문을 타고 있는 리플로우, 그리고 업사이클 브랜드인 프라이탁 등 탑동 일대에는 청년들이 하나둘 찾아오고 있습니다. Re-fons도 인사이트를 얻기 위해 탑동에 위치한 이솝과 프라이탁, 솟솟리버스를 둘러보았습니다. 업사이클링과 친환경을 핵심 가치로 삼고 있는 프라이탁..

[mvp] 피드백 고객 모집

제주 남서쪽에 작은 마을이 하나 있습니다.서귀포시 안덕면의 면사무소 소재지이기도 한 화순은 화순곶자왈로 유명한 곳이기도 합니다.이 마을은 안덕(安德)이라는 이름처럼 편안함과 덕스러움을, 화순(和順)이라는 말처럼 조화로움과 순함을 담고 있습니다.이곳 화순에서 Re-fons는 최소기능제품 mvp(Minimum Viable Product)를 만들었습니다.제주에서 나고 자란 편백나무와 삼나무, 안덕면의 메밀을 떠올리며 제품을 만들어 보았는데요.여전히 개선해야 할 부분이 많지만, 한편으로 뿌듯한 마음이 들었습니다🥰Re-fons는편백나무 향과 메밀껍질의 서걱거림으로 화순곶자왈을 담고 싶었습니다.또한 주트로 만들어진 커버를 통해 마을의 편안함을 담고 싶었습니다.겉커버로 쓰인 주트는 100% 천연소재로 착향성이 높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