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오늘은 회사에 출근을 안 했다. 8월엔 어느 때보다 열심히 일했다. 때론 휴일도 없이 회사에 출근하며, 이것저것 산적한 일들을 처리하느라 야근도 잦았다. 그래서 오늘은 내 자신에게 8월에 대한 보상으로 대체 휴무를 선물했다. 그래서 오전엔 베짱이처럼 쉬기도 하고, 오후엔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일들도 처리했다. 그렇게 하루를 보내고 나니 뿌듯함 혹은 죄책감 비슷한 것을 느낀다. 이 야릇한 감정은 나의 것이 맞을까. 어쨌든 나는 지금 카페에 앉아 있다. 한적한 카페에는 아이유의 “Palete”가 흘러나온다.
2. 잠시 숨을 고르며 책을 읽던 중, 별안간 한 노인이 생각이 난다. 2달 전이었던가 동네 경로당에 앉아 있던 노파와 대화를 나눴던 적이 있다. 나의 업무는 신설한 노인 시설을 홍보하는 것이었지만, 여인과 대화를 나누면서 나는 내 본분을 잠깐 잊을 수밖에 없었다. 그때 나는 노인의 정신이 어떤 젊은이들보다 맑고 투명한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당시 나는 웬지 그녀의 통찰력이 잔뜩이나 굽어 있는 그녀의 몸과 주름 투성이인 피부, 그리고 성대를 긁는 목소리와 어울리지 않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래서 그의 또렷한 정신을 그이의 쇠약해진 몸이 감당할 수 없다는 착각까지 들었다. 하지만 대화의 끝에서 여인은 결국 자신이 곧 소멸되어야 할 운명임을 인지하고 있었으며, 이제는 남겨진 [혹은 남겨질] 사람들에게 부담을 지워주기 싫다는 뜻을 강하게 피력했다. 내 눈가에 눈물이 핑 돌았다. 나는 여러 번 만류했지만, 그는 비장한 죽음을 작정한 듯 자신의 뜻을 굽히지 않았다. 그이는 십자가를 져야 한다는 빌립보의 예수처럼, 제자 베드로의 만류를 부정할 뿐만 아니라 친구를 저주하면서까지 마지막으로 예루살렘 여행을 하려던 예수와 흡사했다. 더 이상 나는 어떤 말로도 그의 생각을 꺾을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우리 사회가 한없이 밉게 느껴졌다. 이 여인의 정신은 어느 젊은이들의 정신보다 강했지만, 이 세상엔 그를 감당할 사람이 없어 보였다. 그녀는 스스로 죽음을 선택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어쩔 수 없는 자의가 아니었다. 부정할 수 없으리만큼 그것은 명백히 사회적 타살이었다. 나는 우울한 생각에 잠겨 그 경로당을 떠났다.
3. 경로당에 무기력하게 앉아 있던 그 노파는 이 나라의 노인들을 상징한다. 나와 같은 젊은이들이 그 노인들을 점점 사회의 변방으로 몰아내는 것은 아닐까 심히 두렵다. 젊은이들의 시선이 노인들을 죽음으로 내모는 것이 아닐까, 심히 염려가 된다. 익명의 젊은이들에 의해 그들은 죽어 가고 있는 것이다. 젊은이들은 노인들의 생산력을 신뢰하고 있는가, 그들을 더 이상 정신이 온전하지 않은 어중이떠중이로 비웃지는 않았는가. 노인들에게 이 희화화의 타자화는 피할 수 없는 숙명일까, 아니라면 피할 길은 없는가, 우리사회의 이 어리숙함이 바뀌지 않는다면, 언젠가 나도 나이가 들어 노인의 숙명을 마주할 때가 오리라. 그러나 할 수만 있다면 나는 이 운명을 거절하고 싶다. 이것과 대면할 용기가 나지 않기 때문이다.
4. 지하철에서 만났던 노인들의 뒷모습이 외로워 보이던 것이 이 때문일까, 죄책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