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기 싫은 책과 문장

윤동주/십자가

habiru 2020. 4. 5. 11:24

 

쫓아오던 햇빛인데
지금 교회당 꼭대기
십자가에 걸리었습니다.

첨탑이 저렇게도 높은데
어떻게 올라갈 수 있을까요.

종소리도 들려오지 않는데
휘파람이나 불며 서성거리다가

괴로웠던 사나이
행복한 예수 그리스도에게
처럼
십자가가 허락된다면

모가지를 드리우고
꽃처럼 피어나는 피를
어두워 가는 하늘 밑에
조용히 흘리겠습니다.

 

 

——-

고난 주간, 윤동주의 <십자가>를 묵상해 봄이 좋겠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범접할 수 없는 숭고함”이다.
이 숭고함을 누구나 기분 좋게 좇아갈 수만은 없는 노릇이다.
그리스도를 따른다는 것(imitatio Christi)이란, 불완전한 인간에게 불가능한 행동이기 때문이다.

어느새 십자가를 올려다 보며, “어떻게 올라갈 수 있을까요”라고 나지막히 말하는 것만이 솔직한 나의 기도가 된다.
희망의 종소리는 들려오지 않는데, 휘파람으로 종소리만 흉내내는 모양이 동네 건달보다도 못한 모양이기에 나는 부끄럽다.

그러나
그리스도에게,
아니 그리스도처럼,
모가지를 내어 놓고 세상을 정화할
일종의 희생제물이 될 수 있다면 말없이 나도 그리하리라,

—하는 시의 무게가 무겁게만 느껴진다. 나는 십자가를 질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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