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기 싫은 책과 문장

잡설: 소설 <투명인간>을 읽고

habiru 2020. 2. 2. 19:32

성석제의 소설 <투명인간>의 이야기는 “김만수”라는 이름의 사내를 둘러싸고 있는 인물들에 의해 전개된다. 주인공 만수(萬壽)라는 이름 속에는 “오래도록 살라”는 좋은 뜻이 담겨 있긴 하지만, 사실 그 이름의 속뜻은 그렇게 중요하지 않다. 일전에 나는 만수라는 사람을 만나본 적이 없지만, 어디선가 그의 이름을 부른다면 한두 명쯤은 나를 돌아볼 것이라고 믿고 있을 정도로 만수는 흔한 이름들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그는 전혀 특별할 것 없는 평범한 사람들을 상징한다. 그래서 나에게 있어 만수는 특정될 것 없는 익명의 “그(녀)”에 가깝다. 그래서 나는 만수를 통해서 평범한, 혹은 평균 이하의 사람들의 이야기 속으로 빠져들게 된다. 그래서 만수와 그의 주변인들이 겪은 이야기를 듣다 보면 어느새 나는 착각에 빠지게 된다. 옆집 1603호의 아저씨가 만수였구나, 윗집에 사는 1704호의 아주머니가 만수였지라고 중얼거리는 것이다. 그렇다고 익명적 만수의 이야기가 휘발성이 강한 것도 아니다. 그의 이야기는 지독히도 사실적이라 구체성을 가진 이야기로서 머릿 속에서 쉬이 사라지지 않는다.
물론 만수의 할아버지와 아버지, 그리고 만수에 이르기까지 3세대가 지나온 두터운 삶의 궤적을 추적하노라면 진이 빠질 때가 있다. “인간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하는 철학적 난제를 뒤로하고, “인간은 어떻게 생존해야 하는가”라는 현실에 부닥치기 때문일 것이다. 근대화의 이기를 누리기 이전, 몸을 날래게 움직이지 않으면 사느냐, 죽느냐의 위협에 내몰린 존재에게 삶의 의미나 철학이 무슨 필요가 있겠는가. 그래서 맥아리 없이 힘이 풀려 책을 접어 버릴 때가 있었다. 그렇다고 작가가 만수를 통해 한국 근현대사의 여러 사회적 문제를 외면하고 아등바등 삶을 영위하기에 바빴던 사람들을 변론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아마 그랬다면 만수 자신이 직접 자기를 변호했을 것이다. 하지만 만수는 단 한 번도 얘기한 적이 없고, 그를 둘러싼 사람들만이 말할 뿐이다. 만수를 둘러싼 30여 명의 주변인만이 말하고 있을 뿐, 만수는 침묵한다. 그렇다고 사람들의 증언이 만수를 중심으로 하거나 만수를 향한 것도 아니다. 그들의 증언은 자신을 향한 삶의 증언일 뿐 만수를 향한 것이 아니다. <투명인간>이 만수에 대한 대서사시가 아닌 까닭이다. 그래서 그런 것일까, 나는 만수가 투명인간의 본질을 잘 보여주는 인물이라고 생각한다. 투명인간이란 피사체가 될 때만이 의미를 가질 수 있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만수는 소시민적 삶을 영위하는 누군가의 이름인가. 어느 누가 만수를 비난할 수 있을 것인가, 만수를 비난하는 것이나 그를 마냥 이해하는 것, 어느 것도 섣불리 교훈으로 삼을 수는 없을 것이다. 아마도 한동안 정리되지 않은 생각들이 나를 혼란스럽게 할 것이다. 다만 인생의 두터움에 대한 경의를 갖게 될 뿐이다. 투명인간만이 투명인간을 알아본다는 것은, (직접적으로나 간접적으로) 두터운 인생을 경험한 이들의 시력에 관한 것이 아닐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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