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

나의 목회자적 소명 의식에 대하여

habiru 2019. 9. 22. 20:50

  가끔 어떤 가수들의 노래를 듣노라면, 도무지 그 노래 속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게 될 때가 있다. 마치 사악한 마녀의 주문처럼 그들의 노랫소리가 귓가에 맴돌아 떠날 줄을 모른다. 마녀의 저주에 걸린 듯, 그들이 만들어내는 가락과 노랫말이 머릿속을 헤집어 놓는다. 아마 그들이 읊조리는 가사와 가락은 희노애락의 진액에 비유될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그들은 평범한 사람들이 느끼는 표현되지 않았던 감정들을 여과 없이 분출시킨다. 따라서 그들이 뱉어 내는 숨결과 호흡에는 진하디 진한 희노애락이 서려 있다. 그리고 이 농축액은 진하디 못해 끈적거림을 준다. 그리고 마침내 진득거림을 유발하는 뮤즈들은 청자들이 입고 있던 옷과 장비들을 해제시켜 버리고, 결국엔 청자들을 무방비 상태에 빠지게 한다. 평소 청자들이 체화했던 경계심과 조심성의 기술들은 무력화되고, 세이렌의 노래에 홀린 오디세우스처럼 청자들은 자기 자신을 기둥에 묶어 두지 않고서는 도무지 버틸 수 없게 된다. 나는 이런 뮤즈들이 진정한 예술가처럼 느껴진다. 그들의 흥얼거림에는 시인이 읊어 대는 시와 같은 수준 높음이 있기 때문이다. 

  다소 생뚱맞을지 모르겠으나, 나는 이렇게 사람을 홀리는 가수들이 제사장처럼 느껴진다. 그리고 나의 상상력은 예술가들에게서 성직자들에게로 향한다. 이는 아마도 내가 인지하고 있는 목회자적 소명 의식에 기인할 것이다. 어찌 되었든, 내게서 예술가들은 눈에 보이지 않는 존재와 눈에 보이는 존재를 연결하는 그런 제사장직을 수행하는 이들처럼 받아들여진다. 나는 그들의 노래를 들으며, 여태껏 경험해 보지 못한 세상을 알게 되고, 잠시나마 그 세상 속에서 살아가게 된다. 가만히 노래를 듣던 이에게서 노래하는 이로 변화하는 것이다. 노래하는 화자로 참여하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새로운 세상 속에서 나는 사라지게 되는 것이다. 일종의 이주요, 전환이라고 할 수 있다. 나의 이야기가 몇몇 이들에게는 몽상에 그치는 이야기처럼 들릴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이것이 종교적 의식 안에서도 동일하게 일어나는 것이라고 확신한다. 

  나는 교회에서 성찬례를 집전하는 성직자들이 그런 가교적 역할을 한다고 생각한다. 성찬례 중에 성직자들은 개시되지 않은(혹은 계시되지 않은) 세상과 개시된(혹은 계시된 세상) 세상의 가교가 된다. 상징적(symbolic)이고도 실재적인(real) 그들의 몸짓과 말을 통해서 예배에 참여하는 이들은 새로운 세상 속에 참여하게 되며, 이주하게 된다. 나는 이것이 교회 예전이 갖고 있는 신비(mystery)라고 본다. 그리고 그것이 교회에서 성찬례를 집행하는 성직자들의 역할이요, 책임이라고 느껴진다.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통로가 되는 것이 제사장적 목회자의 소명이다. 그러나 대개 예배에선 예술가들의 노래와 같이 하늘과 땅을 연결할 만한 거룩함을 찾아보기가 힘들다. 마찬가지로 성직자들에게 하늘과 땅을 연결하는 그런 성숙함을 발견하기도 힘들다. 그러나 나는 분명히 그런 이들을 만난 적이 있다. 그들이 소수자에 불과하여 희소할지라도 말이다. 나는 그렇게 내 목회자적 소명 의식을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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