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

윤동주 시집이 든 가방을 들고

habiru 2019. 9. 18. 08:24

윤동주 시집이 든 가방을 들고 

                                    정 호 승 


나는 왜 아침 출근길에 
구두에 질펀하게 오줌을 싸놓은 
강아지도 한마리 용서하지 못하는가 
윤동주 시집이 든 가방을 들고 구두를 신는 순간 
새로 갈아 신은 양말에 축축하게 
강아지의 오줌이 스며들 때 
나는 왜 강아지를 향해 
이 개새끼라고 소리치치 않고는 견디지 못하는가 
개나 사람이나 풀 잎이나 
생명의 무게는 다 똑같은 것이라고 
산에 개를 데려왔다고 시비를 거는 사내와 
멱살잡이까지 했던 내가 
왜 강아지를 향해 구두를 내던지지 않고는 견디지 못하는가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일은 
사람의 마음을 얻는 일이라는데 
나는 한마리 강아지의 마음도 얻지 못하고 
어떻게 사람의 마음을 얻을 수 있을까 
진실로 사랑하기를 원한다면 
용서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고 
윤동주 시인은 늘 내게 말씀하시는데 
나는 밥만 많이 먹고 강아지도 용서하지 못하면서 
어떻게 인생의 순례자가 될 수 있을까 
강아지는 이미 의자 밑으로 들어가 보이지 않는다 
오늘도 강아지가 먼저 나를 용서할까봐 두려워라

창비시선 135 정호승 시집 <이 짧은 시간 동안> 수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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