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95편
1. (94) 와서 주님께 환호하세. 우리 구원의 바위 앞에서 환성 올리세. (...)
7. 그분은 우리의 하느님 우리는 그분 목장의 백성 그분 손수 이끄시는 양 떼로세. 아, 오늘 너희가 그분의 소리에 귀를 기울인다면!
8. “너희는 마음을 완고하게 하지 마라, 므리바에서처럼 광야에서, 마싸의 그날처럼.
9. 거기에서 너희 조상들은 내가 한 일을 보고서도 나를 시험하고 나를 떠보았다. (...)
11. 그리하여 나는 분노하며 맹세하였노라. ‘그들은 내 안식처에 들지 못하리라.’”
어제던가, 수요예배의 설교를 준비하기 위해서 오래전 읽었던 유진 피터슨(Eugene H. Peterson)의 책을 들춰 보았다. 문득 아남네시스(Anamnesis)라는 말이 생각났다. 아남네시스란 무언가 기억하고 회상하는 것을 뜻하는 그리스어이다. 그래서 교회 전통에서는 그리스도의 고난을 의미하고 상기시키는 성례전을 거행하면서 아남네시스라는 말을 사용하였다. 이를 통해 그리스도의 상처가 그리스도인의 상흔이 되는 것이다.
그렇지만 아남네시스는 성례전에만 국한되는 단어가 아니다. 이집트에서 구원을 받았던 이스라엘 사람들은 여러모로 후대 사람들에게 표본이 되었다. 때로 광야 이스라엘 사람들은 정면교사로 자리매김하였으나, 후대의 역사가들은 그들의 선조들을 반면교사로 삼기도 하였다. 완고함은 광야 이스라엘을 상징하는 단어로 굳어져 버렸고, 하나님의 분노를 사는 악덕으로 평가받았다.
다수의 사람들은 기억을 편집하여 추억을 미화하고는 한다. 이 작업을 통해 좋지 않았던 기억을 좋은 기억으로 순화시키고, 과거의 올무에서 벗어나고자 한다. 그러나 아남네시스는 들춰 내는 것과 비슷하다. 그렇게 들춰낸 기억을 다시 묻지 않고, 들춰낸 상태로 기억을 박제시키는 것이다. 이를 통해 상처는 아물지 않고, 상흔으로 남아 기억된다. 일련의 추억의 조각을 만들어 내는 것과 비슷하다. 나는 교회 전통이 갖고 있던 이 전통이 퍽이나 마음에 든다. 실수를 거듭 되풀이하지 않기를 바라는 장치같아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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