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의 산상설교로 지칭되는 마태복음 5-7장에 담긴 윤리적 성경을 많은 사람이 평화주의적인 것으로 이해해 왔다. 여러 초기 교부들과 톨스토이, 간디, 함석헌, 본회퍼 등은 예수의 사상에서 자신의 평화사상을 이끌어 냈다. 톨스토이는 성서의 예수 사상에 깊이 고무되었을 뿐 아니라 전쟁을 벌이는 국가의 권위에 대해 깊이 회의했다. 그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정부의 폭력은 의도적인 것이며 이성의 왜곡을 통해 작용하므로 사악해지기 쉽고, 분노한 개인의 폭력은 무지에서 비롯되기 때문에 부분적으로만 악할 뿐이라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그는 제도적 폭력을 거부하면서 무정부주의적인 평화주의를 주장했다. 그는 "오로지 폭력에 의해 세워지고 폭력에 의해 유지되며 기독교 규범에 거슬러 끊임없이 악행을 저지르는 권력기관에 기독교인은 복종할 수 없다. 징집, 전쟁, 감옥, 처형은 물론 국민들이 토지를 이용할 가능성까지 박탈할 수 있는 권력기관이 하는 일은 모두 기독교 규범에 어긋난다"고 주장했다.
국가권력의 본질을 폭력적으로 보는 이들은 예수의 비폭력 평화주의적 사상에 근거하여 전쟁 반대의 입장을 표명해 왔다. 이 전통은 교부들로부터 소종파 운동의 흐름을 타고 현대의 전쟁반대운동으로 이어졌다. 메노나이트 신학자 요더(John Howard Yoder)는 이 전통을 일러 '전쟁은 어느 경우에도 옳지 않다'는 원칙을 지켜 왔다면서 기독교 평화주의 전통이란 성서의 평화사상을 결집한 예수에게서 연원하여 4세기 주교 마르탱(Martin)을 거쳐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San Francesco)와 재세례파와 퀘이커들을 통해 전승되었다고 분석한다.
이 전통은 국가의 자연적 권위를 긍정한 그리스-로마 전통의 비평화적인 흐름과 구별된다. 그리고 구약성서에 그려진 전사(戰士) 하나님 전통과 다르고, 세속적인 비평화적 전통을 종합한 전통과도 구별된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은 이웃을 향해 폭력을 행사하는 삶이 아니라 온갖 종류의 폭력에 거리를 둔 삶(renunciation of violence)에서 평화를 지켜 나가야 한다는 입장을 명시적으로 지시한다.
<종교의 두 얼굴: 평화와 폭력>, 박충구, 98-99.
ps.
"뭐시 중한디?"
텍스트 해석에서는 본연의 의미 찾기가 의미 있을 테지만, 텍스트를 해석하는 독자의 독해가 중하기도 헐테다.
거시기한 기독인들에게 톨스토이나 함석헌 선생님 류의 사상이 아주 낯선 사상이겄지만, 톨스토이나 험석헌 선생이나 매우 좋은 독서가들임에는 틀림 없는 듯 허다.
뭐시 중헌지도 모름서 중허다고 말하는 사람보다 톨스토이는 훨씬 진중한 독서가다.
어른들 말이나 착실히 듣는 독서를 하느니, 개폼이어도 폼나게 책을 읽어보고 시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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