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배 자료/묵상

인도하시는 길, 언제나 곧은 길이요

habiru 2023. 11. 22. 12:56

[시편 23:1-3, 공동번역]
야훼는 나의 목자, 아쉬울 것 없어라. 푸른 풀밭에 누워 놀게 하시고 물가로 이끌어 쉬게 하시니 지쳤던 이 몸에 생기가 넘친다. 그 이름 목자이시니 인도하시는 길, 언제나 곧은 길이요.


주님은 인도하신다,
굽은 길 아닌 곧은 길로.


대학에선 철학이 주전공이었지만 기독교학을 복수 전공했습니다. 목회자 후보생을 뽑는 특별전형으로 입학했기에 대형교회에서 주는 장학 혜택도 받았습니다.

주전공이었던 철학은 나름 흥미 있었지만, 학교에선 기독교학 교수님들의 훌륭한 강의 덕분에 성경과 신학을 공부하는 즐거움이 더했습니다. 졸업을 앞두고는 어떤 신학교로 진학할지 고민을 하며 몇몇 교수님들께 상담을 받기도 했습니다. 대부분 장신을 추천하셨지만, 조언을 뒤로하고 침신을 갔습니다. 여러 이유가 있었지만, 아나뱁티스트와 친근하고 보수적이지만 자유로운 침신의 학풍 때문이었습니다.

이후, 신대원 입시를 준비한다고 하니 학교에선 연구실에 자리 하나를 주고 공부할 책값도 매달 조금씩 주었습니다. 옆자리엔 장신과 총신을 준비하는 학생들이 다수였지만, 제가 들어가면서 에큐메니컬한 입시준비반이 되었습니다. 서로 이런저런 얘기를 했지만, 저는 주로 듣는 편일 때가 많았습니다. 신학 공부는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말할 거리가 없었고, 교단 정치에 대해선 문외한이었기 때문입니다.

운 좋게 신학교 입학시험 성적이 괜찮게 나와 장학금을 받고 학교에 입학했습니다. 생각보다 보수적인 학풍에 답답할 때도 있었지만, 여러 분과에서 많이 배울 수 있어서 좋았습니다. 다만 신학교 3년이라는 시간은 너무 짧았습니다.

다시 한번 졸업을 앞둔 신학교 3학년 때, 교수님들께 진학 상담을 요청드렸습니다. 그간 가장 관심 있던 과목은 성서신학이었습니다. 신약학과 구약학, 모두 좋았지만 구약학 W교수님께 먼저 찾아갔던 기억이 납니다.

두서없이 이런저런 고민을 말씀드렸더랬습니다. 개인적으로 성서신학은 재밌긴 하지만, “그래서 이제 어떻게 할까(how to do)”라는 질문에 대해서 답을 못 찾았고, 답을 찾을 수 있을지 모르겠다는 투로 고민을 털어놓았던 것 같습니다. 하나하나 듣고 계시던 교수님은 마지막에 말씀하셨습니다.

“현우는 이론보다 프락시스에 관심이 많은 것 같다. 기독교윤리학을 공부해 보는 건 어떠니? (기독교윤리학자) K교수님은 만나봤니? 훌륭하신 분인데, 상담을 한번 받아보길 바란다.”

그렇게 찾아뵈었던 K교수님과 몇 마디를 나눈 후, 신대원 졸업논문을 교수님의 지도를 받아 쓰고 싶다고 말씀드렸습니다. 되돌아보길 운명적 만남이었고 행운이었습니다. 그렇게 교수님의 지도를 받아 두 편의 석사논문을 썼습니다.

그렇게 신학교 5년을 마무리하면서, (이제야 말하지만) 교회 사역을 그만둔 건 좋지 않은 선택이었던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대학과 대학원에서 전공했던 분야와 무관한 분야에서 커리어를 시작하는 건 어리석은 선택이기에 그렇습니다. 그러나 당시에 저는 장 바니에의 ‘라르슈’처럼 비장애인과 장애인이 함께하는 신앙공동체를 꿈꿨고, 교회와 사회복지제도 경계에서 그 일을 하는 게 수월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를 위해 사회에서 사회복지 일을 시작하는 게 옳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렇게 몇 개월을 고생하다가 시혜적이고 일방적인 사회복지가 아니라, 상호호혜에 기반한 사회적경제, 협동조합의 테두리 안에서 일을 하는 게 맞다고 생각을 바꿔 먹었습니다. 장일순 선생님의 협동조합 이야기를 듣고 나서였습니다.

다시금 이직했습니다. 사회적경제를 연구하는 연구소에서 처음부터 다시 시작했습니다. 직책은 연구원이었지만 역량 없는 입문자에 불과했습니다. 다만 선배들의 도움으로 정책연구, 중간지원연구를 시도해 볼 수 있었고, 나름 보람과 성과도 얻었습니다.

그러나 그 당시에 일과 목회를 병행하는 게 체력적으로 무리라는 걸 체감하면서 이중직 목회에 대한 현실을 보게 된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목회자로서 사회참여에 대한 길에 대해서도 고민을 하게 되었습니다. 내 정체성의 무게중심을 목회자 혹은 활동가 어디에 보다 더욱 둘 것인가에 따라 차이가 생긴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그건 본인만 아는 미묘한 차이지만, 출력되는 결과는 전혀 다르기 때문입니다.

이후 이와 연관된 거버넌스 분야인 기독교시민단체에도 발을 담가보기도 했지만, 나이가 들면서 이제는 조금씩 과거의 발걸음을 반추하게 됩니다. 교회에서 착실하게 하나하나 이루어가는 듯한 이들이 부럽기도 하고, 나는 왜 곧은 길이 아니라 교회 바깥에서 굽은 길을 걸어야 했는지 하나님께 내심 원망스러운 마음도 듭니다. 30대 중반이 되니 슬슬 초조해지나 봅니다.

그러던 중, 아침에 읽은 시편 23편에서 ‘목자되시는 주님께서 인도하시는 길이 언제나 곧은 길’이라고 하는 기도자의 고백이 위로가 되었습니다. 주님께서 인도해 주신 길은 언제나 곧아 있다는 고백은, 살아온 시간의 효용성을 의심하지 말라고 살며시 말하는 듯합니다. 저부터 효용성에 대한 의심을 거둬야 하겠습니다. 저와 같은 고민을 하시는 분들에게도 위로가 있기를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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