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기 싫은 책과 문장

자꾸 떨어져도 괜찮다

habiru 2020. 3. 1. 19:03

양유전이 국전에 처음 작품을 출품했을 때 심사위원 가운데 한 사람은 스승인 김봉룡이었다. 그러나 결과는 낙방이었다. 스승 김봉룡은 양유전에게 낙선한 작품을 내놓으며 다음과 같은 말 한마디를 하고 그만이었다.
“네 것보다 나은 것이 많더라.”
제작 기간 내내 스승의 지도를 받았고, 스승이 손수 보자기에 싸서 들고 올라가 당신이 내어 접수한 작품이었다.
그 뒤 두 번 더 떨어지고 나서 장일순을 찾아갔다. 장일순은 다른 말 없이 <백범일지>를 한번 읽어보라고 했다. 책을 다 읽고 찾아갔다.
“자꾸 떨어져도 괜찮다. 떨어져야 배운다. 댓바람에 붙어버리면 좋을 듯싶지만 떨어지며 깊어지고, 또 자신을 돌아볼 수 있는 법이다. 남 아픈 줄도 알게 되고......”
그 뒤로 양유전은 당락에 개의치 않고 작품을 낼 수 있었다. 국전이 대한민국미술대전으로 바뀌던 해에 양유전은 입선을 했다. 그 뒤 두 번 더 입선하여 합쳐 세 번이 됐을 때 장일순은 말했다.
“이제 더는 출품하지 말거라.”
나이 사십이 됐을 때는 이렇게 말했다.
“나중에 나이가 들면 시골에 가서 밥그릇 같은 것을 만들어 그곳에 사는 사람들에게 나눠주며 살아라. 그러면 쌀 말은 생길 것이고, 쌀 말 있으면 굶지는 않을 게 아니냐? 그러면 되는 거고.”
칠기는 값이 매우 비싸다. 보통 사람은 엄두도 나지 않는 가격이다. 시골 사람에게는 가당치 않은 금액이다. 그런 칠기로 시골 사람들에게 밥그릇이나 만들어주며 살라고 장일순은 말했던 것이다. 양유전에게는 남은 인생의 큰 화두가 아닐 수 없는데, 과연 그는 장일순의 말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궁금했다.
“칠기로 돈 벌 생각하지 말고 자유롭게 살라는 뜻이셨던 것 같아. 지금은 자식이 어려 어렵지만 곧 그렇게 살게 될 것 같아요.”
자식 가운데 하나가 대학에 다닌다고 했다. - 최성현, <좁쌀 한 알>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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