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는 한 선생님으로부터 메시지 한 통을 받았다. "전도사님, 수고가 많으십니다"로부터 시작된 메시지의 내용은 청소년을 대상으로 했던 나의 설교 도입이 길어 중학생 친구들이 이해하기엔 어려움이 따른다는 것이었다. 이제는 어느 정도 내성이 생겼던 까닭인지 큰 고통을 느끼진 않았다. 그럼에도 끝없이 상기되는 그 메시지가 자책을 막을 수는 없었다. 불편한 맘은 사실이었다. 부인할 수 없는 사실 때문이었을지 모르겠다. 여하튼 불편한 마음을 애써 감출 수만은 없었다.
우연찮게 어제는 또한 교회 제직회의에서 전도사 시취 안건이 통과되어 목회자의 도상에 들어선 느낌을 받았던 날이다. (그런데 동시에 설교에 대한 코멘트라니 이건 너무하지 않은가?) 그래서 어제는 한없이 위축되는 날이었다. 변명하고 싶은 마음도 있었으나 크게 변명이 득이 될 것 같진 않아 시도조차 하지 않았었다.
이제는 목회자의 도상에서 설교를 평생 업으로 해야 할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여전히 설교에 대한 후기나 평은 익숙하지 않다. 이미 설교학 수업에선 낙제에 가까운 점수를 받은 터라 자신이 없다. 부끄럽게도 설교 도입이고 결론이고 적용이고 난 잘 모른다. 다만 진심 하나만 통하면 좋겠다는 일념으로 뭐라는지도 모르겠는 설교문을 매주 써낸다. 매주 2편씩, 그 이상을 설교를 쓸 때마다 고통스럽다. 순간 아득해지고 배를 타 멀미를 한 것 같은 울렁증을 자주 느낀다. 컴퓨터 자판 앞에서 요란하게 백스페이스를 눌러내는 모습이 초라해진다.
주여, 이 고통을 언제까지 참아내야 한다는 말입니까? 아주 조금만이라도 미진한 마음이 외떨어진 청중 한 사람에게 전달되었으면 하는 기도를 올린다.
이틀 후, 유진 피터슨의 책에서 위로를 얻는다.
프랜시스는 중서부 지역에서 대학을 갓 졸업하고 고등학교 생물 교사로 일자를 얻어 우리 동네로 이사 온 청년이었다. 사람 대하는 태도는 서툴렀지만 그것을 보상이라도 하듯 매우 똑똑했다. 벤과는 달리 프랜시스는 예배를 드리고 떠날 때마다 내게 말을 걸었다. 그가 한 말은 언제나 내 설교에 대한 비평이었다. 가끔은 내 문법과 발음을 교정해 주기도 했다. 때로는 본문에 대한 해석을 가지고 나와 논쟁하려 들었다. 어떨 때는 해결해야 마땅한 사회적 혹은 정치적 상황을 다루지 못했다고 비판했다. 어쨌거나 무엇이든 꼭 있었다. 그가 무식했거나 잘못 알고 있었다면 그토록 짜증이 나지 않았을 텐데 그의 말은 대체로 옳았다. 그리고 언제나 무례했다. 프랜시스가 여름 방학을 보내러 시카고 근처에 사는 자기 부모네로 갔을 때는 안도가 될 정도였다. 하지만 그는 편지로 계속 나를 괴롭혔다(나는 정말 그가 고의로 그러는 것 같았다). 나를 비판하는 것이 인생의 주된 목적이 된 것 같았다. 2년 후 그는 다시 중서부로 이사를 갔고, 이제는 더 이상 그와 마주칠 일이 없겠지 했다. 하지만 그걸로 끝이 아니었다. 친구들이 그에게 내 설교 테이프를 보내 주면 그것이 발단이 되었고, 내가 쓴 책을 혹시 읽게 되어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3, 4년이 지나자 그는 흥미를 잃었다. 분명 나를 구제불능의 목사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 유진 피터슨, <유진 피터슨>, 19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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