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

탈-근대적 개신교?

habiru 2020. 4. 19. 14:00


1. 어제 저녁에는 신학교에서 함께 수학했던 형님과 간만에 만나 해우를 풀었다. 서로의 안부를 묻고 답하는 것만으로도 가슴 한편에 몽글몽글 정감이 싹트는 것이 느껴졌다. 수화기 너머에서 듣던 목소리의 실체를 눈으로 마주하는 것일 뿐인데, 과거에 함께했던 시간들이 떠오르며 지난 일이 되새겨지는 것은 참으로 신비한 일이다. 이미 잊은 줄로만 알았던 기억의 파편들이 하나의 완성품으로 되살아나는 것은 “몸”의 만남만이 갖는 힘일 것이다. 서로 의제없는 대화를 이어가던 중, 개신교의 근대성과 관련해 공감하던 바가 있어 글로 남기고자 한다.

2. 작년 2월, 교회 사역을 그만두면서 가장 하고 싶었던 것은 휴식과 ‘타 교단의 교회에서 예배를 드리는 것’이었다. 개중 ‘타 교단의 교회에서 예배를 드리는 것’은 어쩌면 휴식보다 더욱 간절한 바람이었는지 모른다. 이전부터 몇몇 교회를 다녀 보기는 했지만, 가장 인상 깊었던 교회의 예배는 천주교회와 성공회교회의 미사였다. 호기심에 찾아가 드렸던 천주교회와 성공회교회의 예배가 인상 깊었던 이유는 “귀찮음” 때문이었다. 그런데 그 귀찮음이 얼마나 기분 좋게 각인되었는지, 나는 귀찮음을 유발하는 교회들을 다시금 방문하고 싶다.

3. 대부분 개신교회의 세련된 예배와 달리, 위 교회의 예배에는 특징이 있었다(성공회교회 제외). 예배당에 들어가기 전, 성수와 함께 상하좌우로 성호를 그리며 하는 기도는 이방인의 입장에서 낯선 의식임에 틀림없었다(천주교회). 예배를 집전하는 이가 같은 톤으로 말을 하는 것도, 사회자의 부름에 회중이 일률적으로 응답하는 것도, 오묘한 화음으로 합창하는 것도, 모든 것이 낯설게 느껴졌다. 개중 백미는 10분 남짓의 짧은 설교와 무릎을 꿇고 하는 기도였다. 내가 드렸던 개신교회의 어느 예배에서도 그처럼 번잡하고 사람을 귀찮게 하는 예배는 없었다. 그러나 예배 중 기도하기 위해 나는 불편하게 무릎을 꿇어야 했다. C. S. 루이스가 “육체의 귀찮음이 사람을 경건하게 한다”였나, 그와 비슷한 말을 했던 것을 기억한다. 덧붙여 그는 모슬렘이 메카를 향해 하루 5회 기도하는 것도 영성 훈련에 도움이 된다고 말했다. 비슷하게도 교회의 성찬과 세례 등의 성례전에도 그와 유사한 가르침이 내재되어 있다.

4. 르네상스적 근대성과 함께 시작된 개신교회의 슬로건은 Sola Scriptura(오직 성경)로 주류 종교개혁자들은 말씀, 즉 설교를 중심으로 예배의식 일반을 개편했다. 그러다 보니 (예배 집전자가 라틴어로 예배를 드리는 등) 이전에 지식 권력을 독점하던 성직자가 허락한 수준까지만 용인되던 청중들의 지적 능력에 계몽이 일어났다. 종교개혁과 함께 시작된 개신교회는 태생적으로 근대주의와 성장과 발전의 시간을 공유한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탈-근대주의를 맞고 있는 시점의 기독교는 여전히 근대성을 탈피하지 못하고 있다. 개신교 목회자의 설교가 주던 역동적 에너지는 사라지고, 이제는 울리는 꽹과리와 같은 의미 없는 목소리가 메아리치는 것처럼 느껴질 때가 많다. 설교를 통해 청중을 깨우치는 예언자적 각성이나, 사람을 치유하는 제사장적 휴머니즘을 찾기 어렵다. 그러다 보니 청중은 도리어 지적 능력이나 공감적 능력이 퇴화되는 위기에 봉착한 것이다. 개신교회가 시대에 뒤떨어진다는 비난을 면하기 어려워하며 쇠퇴되는 반면, 천주교회가 재조명되는 것은 놀랄 일이 아니다.

5. 근대성을 탈피하는 시도 중 하나로 전통으로의 회귀를 들 수 있다. 물론 전통의 회귀가 봉건사회로의 회귀를 뜻하는 것은 아니다. 르네상스의 슬로건을 차용해서 말하자면 Ad Fontes(아드 폰테스), 다시 원천으로 돌아가자는 것이다. 제도화 된 교회의 예배가 아니라 다시금 “몸이 드리는 예배”의 중요성을 생환하는 것이 개신교회가 후기-근대사회에서 살아날 방도 중 하나가 아니겠는가, 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