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

라면에 대한 소고

habiru 2020. 3. 30. 21:50

1. 들어가는 말
어렸을 때, 우리 집은 주일 점심에 라면을 끓여 먹는 행위를 식도락(食道樂)으로 즐겼다. 온 가족이 둘러앉아 KBS의 “전국노래자랑”이나, “쇼! 행운열차”를 시청하며 라면을 먹는 것이 일종의 관례였다. 실은 라면을 먹는 것이 식도락 중 하나라고 하기엔, 시식했던 라면의 종류가 빈약하기는 하지만 혀끝에서 기억하는 몇몇 라면 브랜드가 있다.
개중에는 가장 대중적인 라면으로 뽑히는 신라면과 진라면(매운맛)을 비롯해 열라면과 삼양라면, 너구리(매운맛), 대관령 김치라면, 안성탕면과 스낵면, 짜파게티 등이 있다. 뿐만 아니라 특유의 감칠맛으로 세간에 신선한 충격을 주었던 무파마와 고소함의 풍미가 기막혔던 참깨라면의 잔상도 짙게 드리워져 있다. 또한 아쉽게도 지금은 사라져 버린 콩라면과 뉴면도 잊을 수는 없을 것이다.
어린 시절, 가족과 함께 먹었던 라면은 심지어 맹탕일 때라도 맛이 있었다. 얼큰한 대파와 계란이 풀어진 국물 속에 떡국 떡이나 만두가 들어간 것을 즐거워하며, 나는 허겁지겁 뜨거운 면발을 창자 안으로 집어넣고는 했다. 여태껏 주린 배를 채워 주던 라면에 고마움을 느끼다가, 문득 나는 라면에 대한 감정 혹은 인상을 정리하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이 들었다.


2.1. 라면의 본질: 라면이란 무엇인가
단언컨대 라면은 서민적이어야 한다. 대학 생활을 한다고 고향 집을 떠나 기숙사와 고시원을 전전했던 무렵, 내게 라면은 가장 만만한 음식이었다. 한번은 대학 기숙사에서 컵라면을 먹었던 기억이 있다. 몇백 원이 아까워 해물 라면을 먹을 수 없었던 나는, 매점에서 천 원짜리 왕뚜껑을 골랐다. 나는 그 컵라면에 엄마가 택배로 보내 줬던 건오징어 다리를 잘게 잘라 국물에 불려 먹었다. 마른오징어의 살갗에 라면의 국물이 스며들자, 나는 오징어 다리 빨판이 머금은 국물의 깊은 맛을 음미했다. 국물을 들이킬 땐, 오징어가 우려낸 짭쪼름한 바닷물이 생각나 허기진 마음에 심심한 위로를 받았던 까닭에 눈가에는 눈물이 고이곤 했다. 군 입대를 하고 병장이 되어서도 나는 진짬봉이나 오징어짬뽕을 사 먹은 적이 없는데, 그 이유는 비쌌기 때문이다. 즉 라면에 대한 나의 신념은 라면은 서민적이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때론 프리미엄 라면에 유혹받았던 적이 있으나, 나는 라면이 정초한 자리가 서민에게 있다고 본다. 한우가 들어간 짜파구리를, 나로선 라면으로 인정할 수는 없는 것이다.


2.2. 라면의 보편성: 어디까지 라면인가
투박하게나마 라면을 분류하자면, 나는 라면이 정통(orthodoxy)과 분파(sect)로 나뉜다고 생각한다. 정통파 라면이란, 돼지고기를 육수의 베이스로 삼은 붉은 국물류의 클래식한 라면을 뜻한다. 하지만 국물량만으로 정통파와 분파를 가릴 수는 없을 것이고, 필요 이상의 국물을 버리는 조리법을 택한 비빔면이나 짜장라면까지 정통으로 불릴 수 있을 것이다.
이에 비해 분파적 라면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뉠 것이다. 하나는 면(noodle)에 따른 것이고, 또 다른 하나는 국물(soup)에 따른 것이다. 면을 이용한 유파에는 쌀이나 감자, 칡 등의 재료 성분(전분)을 첨가한 부류뿐 아니라, 생면이나 튀기지 않은(non-fried) 면 등의 제조기술을 택한 부류가 있다. 이들은 비교적 온건한 변화를 수용했기 때문에 라면의 범주로 인정되는 데에 큰 문제가 없다.
그러나 국물에 따라 나뉘게 된 분파에 관해서는 여러 이견이 충돌한다. 맑은 국물표 라면의 등장은 환영을 받았기에, 동요는 없었다고 보는 것이 맞다. 그러나 문제는 카레면 등과 같은 이단아적(heresy) 라면의 등장으로 발생하게 되었다. 아방가르드한 카레(라)면을 포함한 스파게티(라)면이나 부대찌개(라)면, 떡볶이(라)면 등의 등장은 어디까지 라면인지 혼란을 야기했기 때문이다. 레토르트 라면의 탄생까지 다원화된 라면의 세계에서, 여전히 어디까지 라면으로 정의할 수 있을지에 대한 논의가 필요해 보인다. 보수적인 입장에서 이들을 라면의 범주에서 제외시킬지, 혹은 에큐메니컬 입장에서 이들을 라면으로 인정할지 정리가 필요하다.

 


3. 나가는 말
그럼에도 나의 호불호는 존재한다. 모험심으로 시작된 호기가 있다 하더라도, 금세 동력을 상실하여 이내 나는 정통 라면으로 회귀하고는 했다. 처음에는 색다름이 있을지 모르나, 결국 내 입맛엔 정통만 한 것이 없어 보였기 때문이다. 라면의 개별성을 인정하면서도, 나는 혼자서 “본류로 돌아가는 것이 좋겠어”(ad fontes)라고 생각하곤 한다. 하지만 정통 라면에 입맛이 물려 환기가 필요할 때면, 여전히 새로운 라면을 찾고는 한다. 무엇으로 라면의 본질에 더욱 다가설 수 있는지, 또한 라면의 깊은 맛을 헤아리기 위한 최상의 레시피는 무엇인지 쓸데없이 잡설을 풀고 있는 내 모습이 퍽 웃겨 보인다.

'일상' 카테고리의 다른 글

탈-근대적 개신교?  (0) 2020.04.19
제21대 국회의원선거 공보물 감상 후기  (0) 2020.04.08
직장 일을 통한 배움  (0) 2020.03.28
소소한 신변잡기: “팖과 삼(삶)”  (0) 2020.02.29
장 바니에, 그를 애도하며  (0) 2020.02.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