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배 자료/묵상

하나님의 현존을 경험하는 삶

habiru 2019. 6. 28. 08:01

어리석은 자 마음속으로 ‘하느님은 없다.’ 말하네. 모두 타락하여 불의를 일삼고 착한 일 하는 이가 없구나. 하느님께서는 하늘에서 사람들을 굽어 살피신다, 그 누가 깨달음 있어 하느님을 찾는지 보시려고. 모두 빗나가 온통 썩어 버려 착한 일 하는 이가 없구나. 하나도 없구나. 어찌하여 깨닫지 못하는가? 나쁜 짓하는 자들 내 백성을 빵 먹듯 집어삼키는 저들 하느님을 부르지 않는 저들. (시편 53편)

  하나님을 인정하는 자, ‘하나님이 여기 계시다.’라고 말하는 자에게는 복이 있다. 그는 세속에 타락하지 않은 채로 정의를 일삼고 착한 일을 하기 때문이다. 얼마 전, 독서모임 중에 한 목사님께로부터 ‘관상적 영성’에 대해 들어본 적이 있다. ‘관상’을 듣고 난 후, 조금씩 이를 실천해 보고 싶었다. 사실, 이 단어부터 이해하기가 매우 힘들었다. 무언가 포착되지 않는 것을 포착하고자 하다가 마침내는 모두 놓쳐버릴 것 같은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처음 이를 이해했던 것은, ‘눈을 뜨고 기도하는 것’과 관련된 전통에 속한 것이 아닐까 생각한 것이다. 대개 사람들은 ‘눈을 감고 하는 기도’, 즉 부정의 기도만을 참 기도로 생각하기 마련이다. 그래서 일상을 떠나 잠시 외딴곳으로 가서 기도하기 마련이다. 하지만, ‘눈을 뜨고 하는 기도’, 긍정의 기도는 하나님께서 주신 피조 세계를 긍정하면서 기도한다. 그래서 밥을 먹을 때, 독서를 할 때, 일을 할 때도 기도한다. 관상에 대한 내 첫인상이었다.

  그러나 목사님께서는 조금 더 쉽게 관상에 대해 설명해 주셨다. 하나님의 사랑이 나를 둘러싸고 있음을 인식하는 것, 한 문장으로 관상을 정리해 주셨다. 그로부터 2주 정도는 하나님의 현존과 사랑이 나를 둘러싸고 있는 것을 느끼는 것 같았다. 세상이 평화롭게 보였고, 내 마음에도 평화가 흘렀다. 그러나 나의 의지와 무관하게 그 관상적 체험은 길게 가지 못했다. 어느샌가 바빠졌고, 이를 인지할 만한 여유가 사라졌다. 노력해도 이를 획득할 수는 없었다. 이는 관상적 삶의 자세가 능동적일 수 없다는 것을 의미했다. 

  다윗의 시편은, 하나님을 인정하는 것의 중요성을 말한다. 하나님이 없다고 말하는 자는 악을 일삼지만, 반대로 하나님의 현존을 경험하는 자는 선을 일삼을 것이다. 오늘 나는 하나님의 현존을 앙망할 수 있을까. 하나님의 현존을 체험할 수 있을까. 자신이 없다. 바쁜 일과 중에 자주 까먹을 가능성이 크다. 그렇지만, 하나님의 사랑에 둘러싸여 있는 내 자신을 발견하고 싶다. 그 깊음으로 들어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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