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

8월의 어느 밤

habiru 2019. 8. 27. 22:30

  퇴근을 하고 터벅터벅 현관에 들어섰다. 센서등이 나를 반긴다. 그러나 더는 나를 반길 이는 없다. 에휴, 어떻게 저녁을 먹을까 하다가 그냥 끼니를 때우는 것으로 타협했다. 그래서 찬장 한편에 뒀던 라면 한 봉지를 꺼냈다. 그리고 냉장고에서 저온으로 숙성시키던 계란 두 알을 꺼냈다. 냄비에 수돗물을 올리고 냅뒀더니 거품을 물며 승질을 낸다. 늦게 봐서 미안하다고 사과를 하고는 열을 내던 냄비에 라면을 욱여넣었다. 뚜껑은 열린 채로 두는 게 좋을 것같아 억지로 뚜껑을 닫지는 않았다. 머리 뚜껑을 열어 놓은 채로 두는 게 모든 면에서 더 낫기 때문이다. 그냥저냥 그렇게 나는 라면으로 공허함을 달래고, 냉동실에 얼려 두었던 밥을 꺼내 전자레인지에 돌렸다. 그렇게 나는 먹다 남은 라면 국물에 미지근한 냉동밥을 투하하고 철 지난 텔레비전 프로그램을 보며 입 안으로 식은 밥을 욱여넣었다. 

  언제부턴가 밥 먹은 후에 샤워를 하면서 습관적으로 빨래를 한다. 사실 빨래라기보다는 제자리 걸음을 하며 더러워진 옷을 밟는 것이 전부이다. 자기만족인지 모르겠으나 뭔가를 내 발 아래 두고 잘근잘근 밟아 대는 것이 그렇게 기분 나쁘지만은 않다. 샤워를 마치면 나에 의해 밟혀진, 그러나 되려 깨끗해진 녀석을 세탁기에 넣고 탈수 버튼을 꾸욱 하고 누른다. 그렇게 3분이 지나면 짓밟혔던 요놈은 너덜너덜 만신창이가 되어 세탁기에서 나온다. 그러면 나는 그놈을 정신 차리라는 듯이 탈탈 털어 건조대 위에 던져 놓는다.  

  하루의 일과를 마무리하는 일련의 제의를 마치고 팬티 차림으로 나는 베란다에 서게 된다. 때론 겸손하게, 때론 오만한 자세로 나는 지상을 바라본다. 언제 철이 바뀌었는지 이제는 제법 바깥 바람이 선선하다. 조상님들은 시기를 분별하는 지혜가 있어야 철이 든다고 했건만, 어느새 철이 바뀐 것을 나는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 입추도 지난 지 꽤 됐는데 나는 여전히 냉면 생각만 하며 여름을 보내고 있었다. 밖을 쳐다봤다. 누런색의 가로등이 더 누래 보인다. 까만 하늘과 컴컴한 거리를 밝히는 가로등을 보니 이상하게도 멀미를 한다. 아련한 마음 한 줌, 외로운 마음 한 줌, 슬픈 마음 한 줌, 혼합된 감정이 파도처럼 밀려와 나를 물결 위에 띄운다. 

  나는 잘 살고 있는 것인가, 이렇게 사는 것이 옳은 것인가, 사춘기 소년다운 질문들이 머리 속을 헤집어 놓는다. 아직도 나는 철이 덜 들었나, 아니면 이제야 철이 드는 중인가, 알 수 없다. 에휴 잠이나 자야지, 하고는 마음을 접는다. 바지와 웃옷을 입고 침대에 눕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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