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윤리 4

기도와 영성, 그리고 기독교윤리

대학원에서 기독교윤리학을 1학기 공부한 이후, 지금 나의 관심은 '삶의 자리(Sitz im Leben)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형체도 없이 먼지처럼 보이긴 하나 잡을 수 없는 형이상적인 언어가 아니라 흙 먼지 가라앉은 땅바닥에서 학문하는 것이, 기독교윤리의 제 자리일 것이란 생각이 문득 스쳐간다. 그렇다. 처음 내가 기독교윤리를 하기로 결심한 까닭도 결코 윤리적이어서가 아니었다. 어디인지 분간할 수조차 없는 어두움의 심연에서 없는 양심에 조금이라도 가책을 덜 느끼고 싶어서 시작한 공부였다. 겉 보기와는 다르게 내 인생은 보잘 것 없는 고철과 같다. 코팅한 것처럼 윤기 있는 것처럼 보이나 실제로는 녹이 슬어 내구성 떨어진 값어치 없는 고철일 뿐이다. 사람은 속여도 하나님과 나 자신은 속이지 못 하리라..

성경에 대한 공동체적 해석의 필요

리처드 B. 헤이스는 그의 책, "신약의 윤리적 비전" 중에 다음과 같이 스탠리 하우어워스의 글을 소개한다. ​​​​대부분의 미국 그리스도인들은, 의무는 아니라 할지라도, 성경을 읽을 권리가 있다고 가정하고 있다. 나는 그 가정에 도전하고자 한다. 교회가 미국에 있는 개인 그리스도인들의 손에서 성경을 빼앗는 것보다 더 중요한 과제는 없다. 더 이상 성숙한 연령에 도달했다고 믿어질 때, 그 아이들에게 성경을 주지 말자. (...) 차라리 그들과 그들의 부모들에게 말하자. 그들이 혼자서 성경을 읽도록 장려하기에는 너무 타락한 습관에 사로잡혀 있다고. -스탠리 하우어워스하우어워스의 말에 절대적으로 공감한다. 개인의 손에서 성경을 빼앗지 않는 한, 성경은 바르게 해석될 수가 없다.​ 이미 망할 미국 남부의 복음..

스탠리 하우어워스를 읽으며

근래 스탠리 하우어워스의 책을 읽고 있습니다. 를 시작으로 을 읽었고, 지금은 을 보는 중입니다. ​ 저는 종종 스스로를 보수주의자로 말하고 다녔는데, 실은 저와 같은 부류는 정치적/신학적 자유주의자에 가깝다는 그의 지적에 수긍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자유주의에 대한 하우어워스의 문제의식이 상당히 공격적이라는 점입니다. 특히나 이 던진 화두는 바르트가 자유주의 진영에 던진 그것과 비슷하지 않을까 비교 짐작해볼 만한 것이었습니다-이론적으로 어리석고 둔감할뿐더러 자유주의 우파(?)에 속한 제가 받은 느낌이었으니, 자유주의 진영 좌측에 깊숙이 계셨던 분들이라면 더욱 충격적이리라 상상해봅니다-. 하우어워스의 공격적 글쓰기에 (자신도 없는) 논리 방어를 해보고 싶은 생각 이전에, 일말의 종교적 신심이..

덕 윤리에 대하여

우리는 의지뿐만 아니라, 덕을 향하는 본성적은 능력을 소유하고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바로 이것이 우리로 하여금 덕스러운 사람이 될 수 있게 해주는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이 본성적인 능력은 가능태(잠재성)일 뿐이다. 그 잠재성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즉 가능성을 현실성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의지를 적절하게 사용해야 한다. 즉 우리의 의지가 이성적이고 도덕적인 원리에 따라 옳은 행동을 하도록 우리를 인도할 수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옳은 행동이란 올바른 목적을 위하여 올바른 범위 내에서 올바른 방식으로 올바른 사람에게 올바른 것을 행하는 것으로 보았다. 그러나 한 번 올바른 행동을 했다고 해서 덕스런 삶이 창출되는 것은 아니다. 우리의 의지가 영원히 자유로운 것도 아니다. 그보다는 오랜 시간에 걸쳐서 형성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