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배 자료/설교

“태초에”

habiru 2021. 4. 30. 00:49

 

 

(요한복음 1장 / 개역개정)
1.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2.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3.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14.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제 이름은 000이라고 합니다. 사랑하고 존경하는 000 목사님께서 초대해 주신 덕분에 여러분을 뵙게 되어 정말 반갑습니다. 여러분은 오늘 저를 처음 소개받으셨겠지만, 저는 목사님으로부터 여러분의 이야기에 대해 전해 듣고는 했습니다. 말로만 듣던 여러분을 뵙게 되어 다시 한번 진심으로 반갑다고 말씀을 전합니다.

000 목사님과의 인연은 신학교를 입학하면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여기 계신 여러분들은 모두 목사님을 사랑하고 아끼는 분들일 겁니다. 그래서 조금은 편하게 목사님에 대한 앞담화를 해볼까 합니다. 신학교 1학년, 당시 목사님은 외국에서 오랜 시간 살다 오신 까닭에 한국문화에 적응이 쉽지 않으셨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제 기억이 맞다면 목사님은 동기들과 시간을 보내다가 점심시간만 되면 동기들과 함께 식사를 하기보다는 집에서 혼자 식사를 하러 가시고는 했죠. 한국 문화에서는 같이 밥을 먹으면서 친해지고는 하는데, 목사님은 집에서 자주 식사를 하셨기 때문에 조금은 어색하게 느껴졌던 것 같습니다. 식사 때만 되면 집에 간다고 하니, 조금 이상할 만도 하지요. “우리가 뭘 잘못했나...” 목사님은 고집도 있으셔서 아무리 밖에서 식사를 하자고 해도 기어코 집에 가겠다고 하신 것 같아요. 다만, 특별한 이유 없이 자주 본인의 집으로 사람들을 초대해 라면을 끓여 주고는 해서 형수님이 많이 힘드셨을 것 같다는 생각을 뒤늦게 하고는 합니다. 얼마 전에 저도 결혼을 한 터라, 예고 없이 집에 누군가 찾아온다는 게 적지 않은 부담인 것을 알기에 이 자리를 빌려 형수님께 심심한 위로를 전합니다. 여하튼 목사님의 집에 방문한 동기가 대략 누적으로 치면 삼백여 명은 넉넉히 되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저도 처음 목사님으로부터 집에서 밥을 먹자는 얘기를 듣고는, “나 그렇게 친한 사이가 아닌데...”라고 혼자 생각을 했던 기억이 납니다. 많은 동기가 같은 생각을 했을 것 같습니다. 한국의 문화는 가까운 사람을 집에 초대하는데, 목사님은 불특정 다수를 초대했으니 자연스레 일어날 일이 아니었을까 생각합니다.

그럼에도 목사님의 호의와 대접으로 저를 비롯한 많은 동기들이 목사님을 큰 형님, 큰 오빠처럼 따르게 된 것 같습니다. 수업 전후로, 아니 수업 중에도 목사님과 이런저런 얘기를 많이 나눴던 것 같습니다. 잡담이죠. 흥미가 떨어지는 수업에서는 다른 일을 많이 했던 것 같습니다. 그렇다고 오락을 하거나 그런 건 아닌데, 수업 시간에 다른 공부를 한다거나 과제를 하는 그런... 청개구리 같죠. 그러다 보니 강의실 앞자리보다는 뒷자리가 편했고, 그래서 졸업할 때즘 되니 뒤에서 2~3번째 정도 자리가 고정석이 되더라고요. 하지만 수업도 수업인데, 당시 함께 나눴던 이야기와 토론을 통해 배운 점도 많고, 얽혀 있던 생각을 정리하기도 했던 것 같습니다. 그것이 진지한 이야기든, 시답잖은 농담이든, 주고받는 이야기를 통해 생각이 확장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이야기에는 그런 힘이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잠깐 제 이야기를 하자면, 저는 대전에서 5년 동안 전도사 사역을 하고, 지금은 2년 정도 평범한 형제로 신앙 생활을 하고 있는 중입니다. 사역 현장을 떠나겠다고 마음먹은 것은 아니었지만, 자연스레 어떤 사건이 계기가 되어 교회당으로부터 한 발자국 물러나 교회와 기독교 신앙에 대해 생각하며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교회는 여전히 제 삶의 가장 큰 고민이자 사랑이지만, 아직까지 교회 사역의 장으로 돌아가기가 쉽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아마도 코로나와 여러 상황이 겹쳐 그런 것 같습니다.

제가 교회 사역을 그만두게 된 시점에 읽었던 책 중에 <데이브레이크로 가는 길>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헨리 나우웬 신부님이 신학교 교수직을 그만두고 데이브레이크라는 곳에서 장애인 목회 사역을 하게 된 이야기를 담은 책입니다. 그곳은 라르슈 공동체라고 불리는데, 프랑스어로 “방주”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세상을 구원하는 방주로서의 교회를 의미하는 것이겠지요. 그 책에 다음의 이야기가 소개되는데 여러분과 나누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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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아와 루이는 둘 다 오늘 보고 들은 일들에 깊은 감동을 받았다. 라르쉬가 여러 면에서 놀라웠던 모양이다. 다시 콩피에뉴Compiegne으로 나갔을 때, 루이가 말했다. "성만찬을 도왔던 세 분이 가장 기억에 남을 겁니다." 마리아도 동감이었다. 하얀 예복을 입은 장애인 셋이 제단 곁에서 토마 신부를 도와 예물을 준비하는 모습은 오후에 보았던 일들에 담긴 참뜻을 압축해 드러내는 것 같더라고 했다. 
  "톨스토이 소설에 나오는 세 수도사가 생각났어요." 루이가 말했다. 이야기를 되살려보자면 이렇다. 
  머나먼 섬에 러시아 수도사 셋이 살고 있었다. 어느 날, 주교는 아무도 돌아보지 않던 그 섬으로 심방을 가기로 작정했다. 도착해서 살펴보니, 셋 다 주기도문조차 모르는 형편이었다. 주교는 거기에 머무는 내내 열심히 주기도문을 가르쳐주고는 심방결과에 만족하며 돌아섰다. 그런데 배가 섬을 떠나 너른 바다로 나서는 순간, 문득 세 수도사가 물 위를 걷는 게 눈에 들어왔다. 실은, 줄달음쳐 배를 쫓아오고 있었던 것이다. 마침내 꽁무니를 따라잡은 이들이 소리쳤다. "사랑하는 신부님! 가르쳐주신 기도를 잊어버리고 말았습니다!" 눈앞에 벌어진 장면과 들리는 소리에 어안이 벙벙해진 주교가 물었다. "사랑하는 형제들이여! 그럼, 그대들은 어떻게 기도하고 있는 거요?" 수도사들이 대답했다. "그냥 '여기에 저희 셋이 있고, 거기 세 분 하나님이 계시는 걸 아오니, 저희에게 자비를 베풀어주세요'라고 말씀드릴 뿐입니다." 한없이 거룩하고 소박한 모습에 눌린 주교는 간신히 말했다. "섬으로 돌아가서 다들 평안히 지내시구려."
  장애인 셋이 제단 곁에서 예배를 돕는 걸 보자마자, 루이의 머리에는 이 소설이 떠올랐다. 톨스토이가 그려낸 세 수도자처럼, 이들 역시 많은 걸 기억할 수는 없어도 물 위를 걸을 만큼 거룩한 건 아닐까? 라르쉬에 관해 많은 걸 시사하는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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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때로 저는 이 이야기를 떠올리고, 다시 읽어 보고는 합니다. 이야기를 읽고 생각하면, 마음이 차분해지는 느낌을 받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순수한 사람의 사랑과 그 사람 가운데 거하시는 하나님을 생각하면 마음이 따뜻해지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가끔 뜻하지 않게 마음이 상할 때나 지칠 때에도 하나님을 향한 그들의 이야기를 생각합니다. 그렇게 다시금 힘을 얻고는 합니다. 마음이 지칠 때, 하나님을 향한 순수한 사랑과 하나님께서 그 순수함을 좋아하신다는 것을 생각하면서 위로를 받습니다. 그리고 나는 하나님을 향해 순수한 사람으로 살아가고 있는지 돌아보며 이야기를 곱씹고는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하나님은 사랑이셔”라는 말 한마디보다 하나님의 사랑 이야기를 들을 때 더욱 도탑게 느껴집니다. 여러분께도 가슴 뭉클한 사랑과 따뜻한 위로의 경험, 이야기가 있을 겁니다. 대개 그 경험은 이야기로서 말해지고 들려질 때, 감동이 증폭되는 것을 알고 계실 겁니다.

여러분이 몇주째 창세기 본문으로 예배를 드리셨다고 들었습니다. 여러분에게 있어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감동은 어디로부터 기인하나요? 창세기 1장의 선언은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다”입니다. 그러나 창조의 감격과 감동은 천지장조에 대한 선언이 아니라, 오직 이야기를 통해서 우리에게 다가옵니다. 창세기 1장에서 하나님은 성심성의껏 하루하루 창작의 노동을 하셨고, 마침내 여섯째 날이 되어서야 최고의 작품을 만드셨다고 합니다. 자신의 형상을 본떠 만든 작품인 사람은 다른 어떤 작품보다 탁월하게 작가의 혼이 투영되었다는 이야기가 창조 이야기이지 않습니까? 창세기 1장은 자신의 인생 걸작을 만든 작가의 이야기가 아닐까 싶습니다.

1. 이야기를 다시 생각해 봅시다. 들려지는 이야기로써 말입니다. 이집트에서 노예 살이를 하고 있는 요셉의 후손들이 창세기 이야기를 통해 무얼 느꼈을까요? 그들은 자신의 인간성을 팔아야 하루하루를 살 수 있는 이주 노동자들 아니겠습니까? 때때로 나일강의 진흙 속에 인간성이 처참하게 부서지고 뜨거운 태양 아래 인간다움이 증발될 때,창세기의 이야기는 그들에게 어떤 의미였을까요. 하루를 노동으로 연명해야 하는 수고로움이 자신의 인간성을 파괴시킬 때, 창세기 이야기가 어떤 감동을 주었을까요. 그들에게 “인간은 신의 형상이 투영된 존재”라는 이야기는, 얼마 남지 않은 한 줌의 인간성을 보호해 주는 최후의 피난처가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히브리 산파들에게 사내아이를 죽이라는 이집트 파라오의 명령은 서로가 서로의 인간성을 파괴하라는 명령이었지요. 그러나 그들은 명령에 따르지 않음으로써 자신의 인간다움만 아니라, 연약한 어린아이의 생명까지 지킬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제 뜻대로 되지 않자 직접 아이를 살해할 뿐 아니라 자신의 인간성마저 파괴키시는 파라오의 모습 속에 우린 존엄한 인간으로 사는 게 얼마나 어려운지 알게 됩니다.

2. 또한 국운이 쇠해 바빌로니아의 포로로 끌려간 이들에게 창조 이야기는 무슨 의미가 있었을까요? 사자굴과 풀무불에 던져져지더라도 사람에겐 신의 형상을 간직한 아름다움이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배신하고 자신의 신의를 저버릴 만큼 비겁하거나 옹졸해지지 말자는 것이지요. 처음 자신의 인간성을 잃어버린 아담과 하와와 대조됩니다. 실제로 다니엘과 그의 친구들은 다니엘서에서 신과 같은 모습으로 나오지요. 바빌로니아의 창조신화에서는 신의 노역을 대신하기 위해 인간이 만들어졌다고 합니다. 그리고 신의 비위를 맞추지 못하는 인간은 벌레만도 못한 취급을 받습니다. 다시 말해, 신에 버금가는 권력자를 위해 노역을 하라, 권세가에게 비위를 맞추라는 거지요. 바빌로니아에서는 인간에게 노예적 정체성을 강요하고 주입하는 것이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현상이었을 겁니다. 폭력과 살인, 정복 전쟁 위에 세워진 나라에서 인간 존재가 그렇게 중요할 수 있을까요? 내부적으로는 인간 사이의 신의가 사라지고 배신과 거짓, 술수가 판을 쳤을 겁니다. 그래서 바빌로니아 왕이 잠을 청하지 못하고 악몽에 시달렸겠죠. 그러나 창세기의 창조 이야기는 진정한 인간이란, 신의 형상을 닮은 존재라고 하지요. 피식민지의 포로로 끌려와 인간성이 말살된 이들에게는 복음이요, 인간성을 잃어가고 있는 이들에게는 엄위한 경고인 것이지요. 구차하게 살지 말고, 신의 형상대로 살자는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유대인들은 어두운 하루하루의 시간을 버티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3. 하지만 사람답게 사는 것이 어디 쉬운가요? 저도 어려운 것 알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사람답게 살지 못했고, 지금도 사람답게 사는 게 어렵다는 것을 우린 잘 알고 있습니다. 소수의 사람들만이 인간답게 살 수 있었고, 대다수의 사람들이 영혼 없는 사람처럼 살아갔다는 것도 사실입니다.

4. 그래서 사도 요한이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사도는 본격적으로 이야기보따리를 풀기 전에, “태초에”라는 말을 통해 창세기 이야기를 꺼냅니다. 창세기에 등장하는 말씀, 빛과 어둠, 창조의 이야기는 요한복음 안에서 새로이 변형됩니다. 저는 사도 요한이 창조 이야기를 얼마나 깊이 묵상한 분이셨을까, 어떻게 하면 창세기 1장이 당신 안에서 저렇게 아름답게 변주되는 것일까, 경이로움을 느낍니다. 그리고 마침내 다음과 같이 외칩니다!

(요한복음 1장 / 개역개정) 14.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5. 그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나타나셨습니다! 현존하는 신의 형상으로, 진정한 사람으로 말이지요. 그야말로 “참사람”인 아담 아니겠습니까. 참사람으로 소개된 예수님을 중심으로 사도 요한은 창세기 이야기를 완벽하게 변주합니다. 창세기 이야기와 다르지만, 그 이야기의 원형이 고스란히 그 안에 담겨 있습니다. 진정한 사람, 참사람으로서 예수님을 묘사하는 요한이 창조 이야기를 재창조하면서 얼마나 즐거워했을지 상상해 봅시다.

6. 하나님은 성경을 통해 우리에게 이야기하고자 하십니다. 법과 조문이 아닌, 친근한 이야기꾼으로 말이지요. 이야기는 친절하고 온화한 하나님의 성품을 보여줍니다. 제가 왜 이렇게 “이야기”에 관해 길게 말씀드린지 아시죠? 이야기침례교회의 정체성을 생각해 보자는 뜻에서 주저리주저리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이야기침례교회의 모든 분들이 재치 있는 입담꾼이 되셨으면 좋겠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