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감사인사
안녕하세요? 오래간만에 인사드립니다. 진작 인사를 드렸어야 했는데, 인사를 드리려고 할 때마다 역병이 다시 유행하는 바람에 인사드릴 시간을 놓치고야 말았습니다. 저는 2020년 12월 갑상선암 수술을 하고, 지난 1년 동안 방사선 치료까지 잘 마쳤습니다. 수술 당시에 림프절까지 전이가 있었다고 해서 조금은 걱정을 했지만, 다행히 얼마 전 CT를 찍은 결과 다른 기관으로 전이는 발견되지 않아서 이제는 갑상선 호르몬제만 잘 복용하면 될 것 같습니다. 평생 약을 복용해야 하는 불편함은 있지만, 건강한 모습으로 여러분을 뵙고 인사드릴 수 있어서 감사할 따름입니다. 기도해 주시고, 응원해 주신 성도님들께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 새누리교회와 헤세드교회에서의 만남이 인연이 되어 또다시 이렇게 인사를 드리게 되니, 주님 안에서의 만남과 인연이 중요하다는 것을 새삼 깨닫습니다. 오늘 제가 여러분과 함께 나누고 싶은 본문은 변화산 사건으로 유명한 누가복음 9:28~35입니다. 변화산 사건에 앞서 누가복음 9장에서 파송받은 제자들은 여러 마을을 다니며 복음을 전하며 권능을 행했고, 오병이어 사건을 목격했습니다.
2. <우리에겐 속세와 구별된 거룩한 시간, 장소가 필요하다>
그 일이 있고 나서 예수님께서는 몇몇 제자들과 함께 “산”에 오르셨습니다. 이 기록의 이면에는 산이라는 곳이 비일상적인 공간이라는 뜻이 감춰져 있습니다. 반복되는 일상과는 거리가 먼 곳으로 산이 소개되는 것입니다. 예나 지금이나 산은 특별한 장소입니다. 오늘날 대부분 사람에게 등산은 일상적인 일이 아닐 것입니다. 동일하게 산을 오르는 일이란, 목회자 예수님께도 목회라는 일상을 벗어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산은 하늘과 맞닿아 있는 곳으로 천상의 존재를 만나기에 더할 나위 없이 거룩한 장소로 묘사되고는 했습니다. 지상에 매인 존재가 천상의 존재를 만나기에 가장 적합한 곳이 하늘과 가장 가까운 산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올림푸스라는 산에 제우스의 보좌와 신전이 있다거나, 산에 신령이나 요정과 같은 신적 존재가 산다는 것도 같은 이치일 것입니다.
어렸을 때, 지리산 천왕봉에 오른 적이 있었습니다. 천왕봉에 오르면 안개가 끼인 것처럼 앞이 잘 보이지가 않습니다. 바로 구름 때문입니다. 어린 나이였지만 안개와 구름이 드리운 산을 보면서 신비로운 감정을 가진 기억이 납니다. 그것은 쉬이 느낄 수 없는 신비로운 경험일 것입니다. 산에 올라 구름에 둘러싸인 제자들도 비슷한 감정을 가졌을 것입니다. 더욱이 그들에겐 부모님으로부터 들었던 이야기가 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그들의 조상을 산에서 만나시고 구름 기둥으로 인도하셨던 이야기입니다. 그들은 솔로몬 성전에 드리운 구름도 알고 있었습니다. 즉, 산이라는 장소와 구름이라는 이미지는 제자들에게 하나님과의 만남을 떠올릴 신비로운 것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때때로 우리도 산에 올라야 하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계룡산에 올라 기도해야 된다는 말씀이 아니라, 일상의 장소 혹은 시간으로부터 단절, 물러남이 있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일상과의 분절을 통해 거룩함이 형성됩니다. “삶의 예배”, “일상의 예배”라는 말도 좋지만, 때로는 일상에서 벗어나야 체험할 수 있는 거룩과 신비가 있습니다. 속세로부터 구별된 시간과 장소가 중요하다는 것으로 이해해 주시길 바랍니다. 하지만 상황상 예배당, 교회당으로 나오기가 어려울 수 있으니 일주일 중 구별된 시간의 예배와 기도를 통해 영혼을 돌아보는 시간을 가질 수 있을 것입니다. 시간의 리듬을 가지고 기도하고, 예배드리는 것을 경계하자는 것이 아니라, “일상적”인 의미로 전락하지 않도록 주의하자는 것으로 이해해 주셨으면 합니다. 일상에서의 후퇴, 거룩을 통해 여러분도 하나님과 만나시길 빕니다.
3. <영광 vs 수난>
변화산에서의 예수님의 모습은 모세를 떠올리게 합니다. 모세처럼 신적 존재를 대면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아님, 한 발짝 더 나아가 하나님과 같이 된 예수님을 보여주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묵시적 성격의 신구약 성경에서 묘사되는 인자와 예수님의 모습이 영화로운 모습이었던 것을 생각하면 그렇습니다. 그래서 변화산 사건은 예수님께서 신적 존재를 대면할 뿐만 아니라, 예수님께서 신적 존재이심을 보여주는 것으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아들이시자 하나님으로서 드러나신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모세와 엘리야와 대화를 나누실 때의 주제가 영광이 아닌, 죽음이라는 점이 역설적입니다. “그들은 영광에 싸여 나타나서, 예수께서 예루살렘에서 이루실 일 곧 그의 떠나가심에 대하여 말하고 있었다(눅 9:31).” 변화산 사건은 예수님을 향한 대중들의 기대를 완전히 저버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시자 하나님이신 예수님께서 고난을 받아 죽으셔야 한다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이야기입니다. 이미 결말을 알고 있는 청중에겐 이러한 이야기가 그다지 충격적이지 않을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는 충격적인 사건임에 틀림없습니다.
중고등학생 때부터 근본주의 신앙에 가까웠던 제가 우연히 학교 도서관에서 봤던 책 중에 잊히지 않는 책이 있습니다. 바로 “신은 죽었다”입니다. 여러분들도 한 번쯤은 들어보셨을 니체, 하이데거의 책입니다. 물론 제가 그 책을 읽은 것은 아니라는 것을 말씀드립니다. 오해하지 마십시오. 도서관 어느 섹션에 가면 그 책이 꽂혀 있었는데, 저는 그 책을 증오하면서도 또 다른 한편으로는 그 책에 주의를 기울였던 기억이 납니다. 소위 “나쁜 남자, 나쁜 여자”라는 치명적 매력의 이성처럼, 혼자서 애증하곤 했습니다. 가까이하면 다칠 수 있는 그런 것 말입니다. 신이 죽었다고 신성 모독을 하는 그 책이 내 신앙을 앗아가 버릴 것 같은 걱정을 했지만, 그 의미가 무엇인지 궁금해서 그 책에 주의를 기울일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 철학적 요설이 나를 현혹시킬까 봐 두려웠던 것입니다. 제대로 된 신앙이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 책 제목이 오랫동안 기억에 남는 듯합니다.
그런데 여러분이 발칙한 요설을 성경에서 보게 된다고 상상해 보십시오. 세상을 통치하시는 하나님이 죽었다니, 이런 망언이 없습니다. 갈기갈기 찢어서 불태워 없애버려야 할 것입니다. 제자들이 받을 충격도 만만치 않았습니다. 승리하신 하나님이 아닌, 십자가에 매달려 돌아가신 하나님이 주는 반전 속에서 그들이 받을 충격과 공포를 상상해 보십시오. 감당하기 어려운 충격을 받으면 부인하고 부정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반응입니다.
제자들이 비몽사몽 중에 영광스러운 예수님의 모습에 취해 초막을 짓겠다는 이야기는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반응입니다. 그만큼 하나님의 죽음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던 것입니다. 고통받는 하나님, 십자가에 매달리신 하나님을 받아들일 수 없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이 잠에 취해 현실인지, 환시인지 구분조차 못하는 모습은 일면 교회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자신의 꿈과 이상에 집착해 받아들일 수 없는 현실을 잊기 위해 잠을 청하는 우리 모습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예나 지금이나 교회는 승리주의, 정복주의 세계관에 도취되어 있는지 모릅니다. 기독교를 전파하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승리하고 정복하는 것에 몰두된 것은 아닐는지 의심이 들 때가 많습니다. 하나님의 연약함, 수난, 죽음에 대한 이야기를 잊기 위해 잠을 청하는 것은 아닐지 모르겠습니다.
4. <"그의 말을 들어라">
그런데 구름 중에 하늘에서 소리가 들립니다. 제자들은 하나님의 임재 중에 우레같이 ‘그의 말을 들으라’는 말씀을 듣게 됩니다. “그의 말”이 무엇입니까? “나를 따라오려는 사람은,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오너라(눅 9:23).” 이제 고통 중에 계신 하나님을 인정할 뿐만 아니라, 그 하나님을 따라 제자들이 수난과 죽음을 자신의 운명으로 받아들여야 하는 것입니다.
이번 사순절을 보내면서 문득 ‘왜 예수님께서 수난 당하셔야 했는가’, ‘왜 예수님께서 당신의 제자들에게 함께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고 하시는지 의문이 들었습니다. 그리고는 제가 재작년에 수술을 하기 전후로 가졌던 생각들이 떠올랐습니다. 당시 저는 결혼을 3개월 정도 앞두고 갑상선암 수술을 해야 한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습니다. 그렇게 10월 말일에 결혼을 하고, 12월 초에 수술을 하게 되었습니다. 결혼이라는 큰 행사를 앞두고 흥분할 수 있었던 제게 일련의 과정은 인생 앞에 겸손할 것을 가르쳐 주는 것만 같았습니다.
질병과 고통 앞에 삶을 돌아보는 시간을 가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깨달음이라고 말하기엔 별 것 아니지만, 질병 앞에 지난 삶을 돌아보고 지난날의 실수와 잘못을 떠올리고는 했습니다. 한편으로는 비슷한 질병을 가진 환우들에 대해 아주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환우의 고통을 조금이나마 내 안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조금이나마 다른 사람의 외로움과 슬픔에 공감하는 것입니다. 심각한 질병이라고 하기엔 어설프기에 다른 사람의 아픔과 슬픔을 받아들인다는 것이 얼마나 주제넘은 말인지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백분의 일이나마 그 마음을 헤아릴 수 있는 계기가 생겼다는 점에서 질병이 주는 가르침이 있었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유사하게 이스라엘은 기나긴 고통과 슬픔의 시간 속에서 고난의 의미에 대해 배울 수 있었을 것입니다. 이사야서 53장에 나오는 “종의 노래”를 생각해 보십시오.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써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매를 맞음으로써 우리의 병이 나았다(사53:5b).” 이스라엘이 인고의 시간을 통해 예수라는 꽃을 피워냈다는 것을 말입니다. 인류의 상처와 고통을 자신의 삶으로 농축하고 집약시킨 예수님의 삶에서 인류의 고통이 예수에게로 전가되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제자 공동체도 예수님 홀로 감당한 그 고통을 함께 분담해야 된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것이 제자더러 자신의 십자가를 지라는 예수님의 명령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그것이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우리가 채우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골 1:24). 수난과 고통을 통해 우리의 영혼은 한 단계 성장하고 성숙해질 것입니다. 사순절을 맞아 그리스도의 고통과 수난, 그 의미가 제자로 살기를 다짐하는 우리 가슴 속에서 더욱 명징해지기를 바랍니다. 아들을 잃은 김현승 시인은 자신의 눈물이 “흠도 티도 금가지 않은 나의 전체”라고, ‘가장 값진 최후의 것’이라고 합니다. 숭고한 고통의 의미를 깊이 묵상하는 사순절 여정이 되시길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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