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쉽지 않은 질문입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답하시겠습니까? 톨스토이는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라는 소설에서 3가지 질문을 던집니다. 그 질문은 다음과 같습니다. 1)사람의 마음에는 무엇이 있는가, 2)사람에게 주어지지 않은 것은 무엇인가, 3)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마지막 질문“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라는 질문을 기억하며 창세기 1:27을 읽었으면 합니다.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창세기 기자는 말하기를,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Imago Dei; 이마고 데이)을 본따 만들어졌다고 합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공통점이 있다는 것이지요. 하나님을 알게 되면 자연스레 사람을 알 수 있다고 추론하게 됩니다. 그 반대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형상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을 것 같습니다. 하나는 본질적 의미이고, 또 다른 하나는 기능적 의미입니다. 그래서 저는 하나님의 형상을 통해 사람의 본질이란 무엇이고, 사람의 기능이 무엇인지 생각을 나누고자 합니다. 어려운 말 같지만, 같이 대화를 나눠 보면 이해 직관적으로 이해하실 수 있을 겁니다.
첫째, 개간과 개척이라는 단어 안에는 남성성이 스며들어 있습니다. 여성에게 모험심이 없다는 말로 듣지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 서부 시대, 마초적 남성이 쌍권총을 쏘며 부정의한 무리를 소탕하는 모습을 상상하면 될 것 같습니다. 이와는 달리 생명을 잉태하고 출산하는 행위는 여성만이 할 수 있습니다. 어머니 자궁 안에서 양분을 얻어 성장한 태아는 출생하고서도 어머니의 모유를 먹어야 생명을 유지할 수 있는 것과 같습니다. 즉, 앞서 창조 사역을 통해 드러난 하나님은 남성성과 여성성을 동시에 지닌 아버지이자 어머니와 같습니다. 그렇게 우리는 사람의 본질에 대해 근원적 질문을 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만들어진 인간이 남자와 여자로 창조되었다는 것에서 우리는 사람의 존재에 대해 묻게 되는 것이지요. 하나님의 창조사역에 드러난 남성성과 여성성은, 하나님께서 균형과 대칭, 조화로움 중에 계신 분이라고 말하는 것으로 들립니다. 남자와 여자는 홀로가 아닌 서로를 통해서 균형과 대칭, 조화로움을 이루게 됩니다. 남자와 여자가 같이 있을 때에야 비로소 균형감을 갖게 되는 것이지요. 그래서 동양에서는 남녀를 음과 양으로 설명하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음과 양이 회오리치듯 움직여 만드는 역동성이 태극인 것이지요. 남녀는 서로를 마주하는 과정을 통해 진정한 자기 자신을 찾게 됩니다. 그래서 저희 부부는 결혼반지에 에제르 케네그도(ezer kenegdo)라는 문구를 새겨 넣었습니다. 히브리어로 “마주보는 것으로부터의 구원”이라는 뜻입니다. 다른 말로 배우자를 뜻합니다. 즉 하나님처럼 사람의 본질도 균형과 조화로움을 지녔다고 할 수 있습니다.
둘째, 본문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을 닮은 사람의 소명에 대해 근원적 질문을 하게 됩니다. 사실은 이 질문이 더 중요하다고 봅니다. 왜냐하면 창세기 기자의 관심은 하나님의 본질과 본성을 정의하는 신학 이론이 아닌, 하나님께서 하신 창조사역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본질에 대해 부연하고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본질에 관해 유추할 만한 거리를 제공하고 있지 않는 것입니다. 만약 창세기 기자가 하나님에 관한 이론신학에 관심이 많았다면, 무소부재하신 분으로 처음부터 스스로 계셨던 하나님을 강론했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애초에 창세기 기자는 선과 악의 기원, 하나님의 위격에 대해 관심이 없습니다. 그는 단지 하나님의 “노동”을 기술할 뿐입니다. 창세기 기자로 알려진 모세 선생님이 40년 간 양을 치셨으니, 이론이 아닌 실제 목양과 목회에 관심이 많으셨던 게 당연한 것이 아닐까 합니다. 창세기 기자의 진술을 따라가 보면, 실제 하나님의 창작 노동과 그에 대한 기능에 대해 대부분을 할애하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6일 동안 세상을 창조하셨습니다. 창조사역을 짧게 요약해 보겠습니다. 첫째 날의 창조사역은 빛과 어둠을 나누는 것이었습니다. 둘째 날은 하늘 궁창을 중심으로 해서 위아래로 물을 나누는 창조사역이었습니다. 셋째 날의 사역은 하늘 궁창 아래의 물을 분리해 뭍과 바다를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넷째 날의 사역은 빛과 어둠을 주관하는 광명체를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이를 통해 시간 질서가 잡히게 됩니다. 그런데 혼란스럽지 않으신가요. 이미 첫째 날부터 빛과 어둠, 낮과 밤이 있었는데 이제야 광명체가 만들어지다니요? 해와 달이 만들어진 후에 빛과 어둠, 날과 계절(시간)이 만들어지는 게 순서상 옳아 보이는데 그렇지가 않습니다. 조금 다르게 읽어 봅시다. 빛과 어둠이 나누어진 공간, 그 빈 공간에 무언가가 채워지게 된다는 것이지요(1째일-4째일). 마찬가지로 다섯째 날에는 둘째 날에 만들어진 하늘 궁창과 바다에 새가 날아다니게 되고 물고기가 헤엄치게 됩니다(2째일-5째일). 그렇게 여섯째 날에는 셋째 날에 만들어진 땅의 공간에 땅의 짐승과 함께 사람이 만들어지게 되는 것이지요(3째일-6째일). 요약하자면, 먼저 공간을 만드시고 그 비어 있는 공간을 충만케 하시는 하나님의 사역을 보게 됩니다. 그리고 드디어 하나님께서 인간더러 자신의 동반자로서 사역하라고 말씀하십니다. 28절이지요. 생육하라, 번성하라, 충만하라. 하나님께서 허무했던 곳을 당신의 노동을 통해 충만하게 하시면서 그곳을 생육과 번영으로 복을 내리셨던 것처럼 동반자로서 사람도 하나님과 같은 노동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응당 사람은 만물을 소생케 하고, 충만케 하고 풍요롭게 하는 소명을 부여받은 것입니다.
다시 말해, 창세기 1:27~28 본문은 사람이 무엇으로 사는지에 대한 이야기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이야기의 방점은 자칫 사변화 될 인간론이 아니라, 실천적 인간의 기능론에 맞춰져 있다고 생각합니다. 믿음 있는 사람은 행동을 통해 자신의 믿음을 증명한다는 이치와 비슷합니다. 사전에 보니 사랑이란 “어떤 사람이나 존재를 몹시 아끼고 귀중히 여기는 마음. 또는 그런 일.”이라고 합니다. 저는 존재를 아끼고 귀하게 여기는 사랑이 생육시키고 충만케 하는 행위와 상통한다고 생각합니다. 때문에 이러한 사랑의 행동을 통해 자신의 사람됨이 드러나고, 나아가 사랑의 행동을 통해 사람다워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사람을 파괴하고, 위태롭게 하는 행위는 사람으로 해서는 안 되는 일일 것입니다. 만약 그런 행동을 한다면 사람다움을 잃은 것이지요. 얼마 전, 정인이를 학대해 숨지게 한 양부모 같은 사람더러 사람이 아니다,라고 하는 것과 같습니다. 사람이 아니라 강아지나 송아지의 이름을 붙여 사람을 욕되게 하는 것도 비슷하다고 생각합니다. 사람을 풍요롭게 하여 생명을 얻게 하는 일, 그게 바로 우리 주님의 사역이지 않았습니까? 주님을 흠모하고 따르는 제자로서 우리는 주님께서 보이신 진정한 사람다움을 향유하고자 애쓰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한편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남자와 여자로 지어졌다는 것에는, 서로 사랑하며 살아가라는 하나님의 깊은 뜻이 숨겨져 있는 것이 아닐까 합니다. 그렇게 서로를 사랑하며 사람다움을 누리게 되는 것이지요. 사람이라는 단어의 어원이 “살다”의 어간에 “ㅁ” 접미사가 붙어 사람이 되었다는 말이 있더라고요. 충만케 하는 사람, 그렇게 사랑하는 사람. 그런 사람다움이 주님이 세우신 공동체 안에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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