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배 자료/묵상

고상한 슬픔의 시인

habiru 2019. 6. 30. 09:24

  시인은 정제된 언어를 사용한다. 그러나 정제된 언어는 포장하는 언어라기보다는 절제된 것과 유사하다. 넘치는 느낌과 생각을 여과 없이 내뱉는 것이 아니라 정화의 거름망을 거쳐 불순함을 제하는 것이다. 그래서 정제된 언어는 본질에 더욱 가까우며, 포장되었다는 느낌이 들지 않는다. 담백한 그 맛이 잘 우러난다. 찻잎의 향내음이 하늘로 올라가 흠향되는 것과 같다. 그래서 시음자는 맛을 보지 않아도 맛을 본 것 같은 착각에 빠지게 된다. 후각의 미각화, 그것은 시인의 마법이다. 

  다윗은 정제된 언어의 대가다. 그처럼 시의 언어에 탁월한 성경 기자는 많지 않다. 순도 높은 그의 언어는 독자에게도 살아 있는 듯 생생하게 움직인다. 

“제 마음이 속에서 뒤틀리고 죽음의 공포가 제 위로 떨어집니다. 두려움과 떨림이 저를 덮치고 전율이 저를 휘감습니다.”

”제가 생각합니다. ‘아, 내가 비둘기처럼 날개를 지녔다면 날아가 쉬련마는. 정녕 멀리 달아나 광야에 머물련마는. 셀라 폭풍의 세찬 바람 피하여 은신처로 서둘러 가련마는.’ 

언젠가 설교를 준비하여 시를 써 보았다. 예레미야애가의 acrostic 답관체를 표현하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본문의 이해를 돕기 위한 시를 쓰기 위해 설교보다 더욱 오랜 시간을 쏟아부었던 기억이 난다. 산문에 비해 운문은 더욱 많은 에너지를 들게 한다. 그만큼 감정과 생각의 정제에는 많은 양의 수고가 필요하다는 것을 반증한다. 그래서 다윗의 시는 정직하고, 우아한 기품이 있다. 목구멍에 거름망을 두고 늘 시인의 언어로 늘 말하고 싶다. 발화되는 기도와 찬양, 표현이 진실에 가깝기를. 

'예배 자료 > 묵상' 카테고리의 다른 글

Kyrie eleison  (0) 2019.07.02
골리앗의 망령  (0) 2019.07.01
다윗과 나, 차이를 넘어서서  (0) 2019.06.29
관상이란 하나님과 친밀한 삶  (0) 2019.06.28
하나님의 현존을 경험하는 삶  (0) 2019.06.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