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준국어대사전에서 공부(工夫)란 ‘학문이나 기술을 배우고 익힌다’라는 뜻으로 정의됩니다. 하지만 우리나라와 달리 중국에서는 공부의 한자어 표기가 혼용되어 공부(功夫)로도 쓰인다고 합니다. 이 단어는 중국 무술을 뜻하는 쿵후로 알려져 있는데, 무술 외에도 숙달된 솜씨, 시간이라는 뜻이 있습니다. 넓은 의미에서 공부는 기술이나 지식을 쌓기 위한 노력이나 재주, 과정을 통칭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우리나라에서 공부는 협소하게 입시나 면허증(혹은 자격증), 각종 능력시험을 위한 학업의 의미로 통용되고 있습니다. 공부의 역량(성적)이 타인에 의해 감정되는데, 그러다 보니 자기평가의 기능이 부족한 것이 사실입니다. 우리나라 교육과정에서 학생 간에 우열을 가리기 위한 등급제 상대평가가 많은 것이 그 증거입니다. 교육과정에서 스스로를 되돌아보도록 하는 반성과 성찰의 기능이 사라진 것입니다.
1)고등교육기관으로서 대학은 유교의 경전인 《대학》(大學)에서 유래했다고 합니다. 《대학》은 공부의 목적을 담은 경전인데, 교육기관으로서 대학의 설립이념과 교육철학을 곱씹게 합니다. 대학의 교육관이 공부의 목적을 살피는 데에 있기 때문입니다. 초등·중등·고등학교와 달리, 자신이 해야 할 공부를 스스로 찾아서 하는 시스템이기 때문에 그럴 것입니다.
그러나 다수의 대학이 교육의 성과를 홍보할 때, 취업률을 주요한 지표로 삼고 있는 현실은 대학의 설립목적을 의심스럽게 합니다. 대학 교육의 실적을 취업률로 여기는 현실이 씁쓸할 따름입니다. 취·창업을 위한 공부가 가치 없을 수는 없지만, 무척이나 서글픈 모습이 아닐 수 없습니다.
《논어》에 나오는 위기지학(爲己之學)은 위인지학(爲人之學)과 비교되는 말입니다. ‘남을 위한 공부’라는 뜻의 위인지학과 달리, 위기지학은 ‘자기 자신을 위한 공부’를 말합니다. 입신출세를 위한 공부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우리 시대의 스승’으로 찬사를 받는 신영복 선생님께서는 옥중생활 중에 백련강(百鍊剛)이라는 글귀를 쓰시며 자신을 단속하셨다고 합니다.
2)“좋은 쇠는 뜨거운 화로에서 백 번 단련된 다음에 나오는 법이며, 매화는 추운 고통을 겪은 다음에 맑은 향기를 발하는 법이다(精金百鍊出紅爐 梅經寒苦發淸香).” 감옥을 홍로(紅爐)처럼 자기 자신을 단련하는 공간으로 삼고, 무기징역형을 한고(寒苦) 속의 매화처럼 청향(淸香)을 예비하는 시절로 삼아야겠다는 생각으로 감옥에서 붓글씨로 자주 쓰던 글귀입니다. 돌이켜보면 감옥은 나의 경우 대학(大學)이었습니다. 인간에 대한 이해, 사회와 역사에 대한 깨달음을 안겨 준 ‘나의 대학 시절’이었습니다.
오늘날 공부에 대한 곡해를 반성케 하는 고전적인 통찰입니다. 생명운동가 장일순 선생님께서 감옥살이를 수행의 좋은 기회로 여기신 것도 유사한 연고일 것입니다.
20대 후반, 진로를 고민하며 갈팡질팡하던 제 자신을 일깨웠던 말씀이 있습니다. “현우! 너는 이론보다 프락시스(praxis)에 관심이 많구나!” 죽비(竹篦)처럼 울린 말씀에 산만했던 정신이 맑아졌습니다. 이를 지금도 사변적 인간이 되지 않기 위해 바지런하게 자신을 돌아보는 경책으로 삼고 있습니다. “공부란 자신을 열고 새로운 세계를 받아들여 변화된 자신에게로 돌아가는 것이다.”라고 말씀하셨던 은사님의 교훈과도 의미가 상통합니다. 또한 “공부에 완성이란 없다. 과정만 있는 것이다. 사상이란 공부의 완성에서 얻는 결과물이 아니라, 과정에서 나오는 결과물일 뿐이다.”라며 거듭 말씀하셨던 은사님의 가르침이 떠오릅니다.
그런 면에서 공부는 자신을 닦으며 나아가는 자기수행(自己修行)으로 볼 수 있습니다. 공부는 성찰을 위한 참선으로 자기 자신을 발견해 충만케 하여 그릇을 키우는 방법입니다. 그 의미에서 공부란 참나(眞我)를 발견하기 위한 위기지학에 가까울 것입니다.
이 때문에 책상 위의 공부가 전부일 수 없습니다. 구수한 커피를 음미하며 나누는 가족과의 대화, 싱그러운 꽃내음을 맡으며 강아지와 함께하는 산책, 밥공기에 말랐던 밥풀을 온수에 불려서 하는 설거지, 정돈된 자세와 마음으로 시작하는 아침 명상, 순수하게 지남력만으로 행선지를 찾아가는 발걸음, 그 모든 것을 공부로 말할 수 있습니다. 하물며 과하지욕(跨下之辱), 바짓가랑이 밑을 기어가는 치욕 속에서 배우는 겸허함도 공부로 칠 수 있습니다.
은밀하게 재정의를 하자면, 공부란 에고(ego)가 제 모습을 반성하고, 참나의 깨달음을 추구하는 행위입니다. 타인에게 쓸모 있는 존재가 되기 위한 몸부림이 아닙니다. 타인의 쓸모에 따라 수집되고 이용되기를 거부하는 것이며, (라캉의 말을 빌리자면) ‘타자의 욕망을 욕망하는 존재를 거부하는 것’과 같습니다.
언젠가 나무가 빼곡하게 자리 잡은 숲속에서 하늘을 향해 기다랗게 자란 동백나무를 본 적이 있습니다. 셀 수 없이 많은 나무 무리에서 자란 동백나무는 커다랬습니다. 그러나 기다란 높이와 달리 그 모양은 볼품없었습니다. 동백꽃과 잎사귀가 무척이나 초라했기 때문입니다. 햇볕을 조금이라도 더 받기 위해 다른 나무들과 경쟁한 까닭에 내실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우리 집에 심어진 동백나무는 홀로 자란 까닭에 붉은 꽃과 푸른 잎사귀가 조화롭습니다. 키는 크지 않지만, 부채 모양으로 펼쳐진 비율에 기품이 넘칩니다. 그 자태가 동백나무 본연의 아름다움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 열매는 탐스러우며 단단하고 밀도가 있어 윤기가 흘러넘칩니다. 경쟁하기보다 나무다움, 그 본질에 집중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공부는 서열에 따른 열패감을 야기하는 경쟁사회의 폐단으로 퇴색되었습니다. 공부의 역량 ‘수준’만 부각되다 보니, 인격을 수양하는 ‘과정’과 ‘노력’의 의미는 외면된 것입니다. 하지만 공부의 궁극적 목적이 수행을 통한 진정한 자기(self) 발견이라는 것은 중요합니다. 목수에게 베이지 않을 나무가 되기 위해 노력한 가죽나무가 천수(天壽)를 누려 큰 나무가 될 수 있었다는 이야기는 공부의 이유를 되돌아보게 합니다. 그런 면에서 공부는 “사람을 깨우쳐 무엇이 옳고 바르며 떳떳한지 헤아리게 하는” 영적 훈련입니다(잠언 1:3). 영혼이 정화되고 맑아지는 인생 공부를 하고 싶은 까닭입니다.
1) 이외 유교의 경전 사서(四書)에는 《논어》(論語), 《맹자》(孟子), 《중용》(中庸)이 있고, 삼경(三經)에 《시경》(詩經), 《서경》(書經), 《주역》(周易)이 있다.
2) 신영복, 처음처럼: 신영복의 언약 (파주: 돌베개, 2016), 1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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