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시 제 소개를 드리고 싶습니다. 저는 어린 시절 기독교 가정에서 태어나 자랐습니다. 그 덕분에 자연스럽게 기독교 중심의 세계관과 문화를 습득하게 되었고, 이로 인해 선생님과는 다른 배경에서 이야기를 나누게 될 것임을 이해해 주셨으면 합니다. 사람마다 살아온 세상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종교, 더 나아가 본질적인 영적 생활에 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것은 기독교에만 국한되지 않았습니다. '영적'이라는 개념은 다양하게 정의될 수 있지만, 저에게는 나를 구성하는 정신의 본질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성인이 된 이후에는 기독교 교회에서 정한 규범을 넘어 진리가 무엇인지에 대한 호기심을 가지고 살아왔습니다. 여러 곳을 탐색하고, 성서에서 말하는 진리를 연구하기도 했습니다.
이제는 목사이자 종교인이 되었지만, 여전히 저는 구도자로 불리고 싶습니다. 제가 선택한 구도의 방식은 기독교였으며, 이는 기독교에만 진리가 있기 때문이 아니라 제가 걸어온 길의 궤적이 기독교와 연결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제가 기독교에 진리가 있다고 믿지만, 이를 강요하거나 설득하고 싶지 않다는 점을 먼저 말씀드립니다. 아마도 선생님께서 가장 염려하셨던 부분이 바로 그런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선생님께서는 '두려움'과 '죽음'이 종교로 귀의하는 발단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정말 일리 있는 말씀입니다. 역설적으로도 '죽음'은 '살아있음'의 의미를 더욱 깊이 있게 만들어 줍니다. 죽음이 존재하기 때문에 삶이 진정성을 갖는다고 느낍니다. 언젠가 읽었던 주제 사라마구의 소설 <죽음의 중지>가 떠오릅니다.
세세한 내용은 기억나지 않지만, 죽음이 사라진 어떤 국가의 이야기였습니다. 그러나 그런 나라는 유토피아가 아니라, 죽지 못해 살아가는 사람들의 지옥이었습니다. 죽음 없는 삶은 생동감 없는 죽음일 뿐입니다.
우스갯소리일지도 모르지만, 저는 죽음이 두려운 동시에 살아 있는 자들에게 주어진 선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야만 '살아 있음'이 체험되기 때문입니다. 흥미로운 예를 드리자면, 육지에서 자란 제가 제주에서 느끼는 아름다움을 제주 출신의 사람은 종종 느끼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제주 아닌 곳'이 있기 때문에 '제주'가 아름다울 수 있다는 아이러니가 존재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죽음은 삶을 풍요롭게 하는 선물이라고 믿습니다.
'죽음'과 '두려움'에 대한 생각을 잠시 나누었습니다. 성서에서도 영생과 사망에 대해 여러 차례 언급하는데, 이는 영생과 삶에 대한 긍정적인 시각을 나타낸다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교전 수칙(죽음과 두려움, 종교)을 깨뜨리는 것이 보다 의미 있는 대화를 나누는 여지를 제공한다고 믿습니다.
오늘은 여기까지 나누겠습니다. 평안한 저녁 시간 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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