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에서는 성탄 전의 4주간을 대림待臨이라 하여 “그리스도의 임하심”을 기다리는 절기로 지키고 있다. 이 기간 동안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의 오심을 기리며, 기다림에 대해 묵상하고는 한다. 이때, 기다림의 대상은 기다림의 정서 혹은 행위보다 우선순위에 있다.
그러나 오늘 새벽, 문득 깨서는 차마 기다릴 수 없는 사람들, 기다림과 친숙해질 수 없는 이들이 생각났다. 대림의 핵심이 기다림의 대상이라지만, 기다림의 정서를 차마 공유할 수 없는 이들이 기억난 것이다.
꿈 속에서 나는 목전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은 이를 만났다. 악귀의 간사한 속삭임에 눈 앞에서 생을 달리한 이를 되살릴 수는 없었다. 급하게 나는 그를 병원으로 옮겼지만, 다시 그의 생명을 소생시킬 도리가 없었다. 가까운 이의 생명을 허망하게 잃게 되자 나는 잠에서 깼다.
새벽 다섯 시가 넘은 시각, 새벽송을 부르며 고대하던 그리스도의 나심을 찬송하던 시각에 나는 가족 같이 아끼던 사람을 잃은 것이다. 이제는 더 이상 만날 수 없고, 기다릴 수 없는 그의 마지막 모습과 성탄의 기다림 사이, 미묘한 엇갈림 앞에 나는 말을 잃었다. 기다림의 기대감이 꺾인 사람들에게 그동안 내가 무심했구나, 생각이 지나갔다.
사랑하는 가족을 잃은 나에겐 죽음의 강을 건너간 사람, 사자死者를 기다리는 것이 부질 없는 행위가 되었고, 기다림은 소모적인 감정을 소환시키는 행위처럼 느껴졌다. 아마도 성탄의 새벽, 사랑하는 이를 잃은 이들에게 대림이 어떤 의미로 다가올지 생각한다. 대림의 절기, 기다릴 대상을 허망하게 잃어버린 이들에게 어떻게 기다림의 의미에 관해 대화할 수 있을 것인가, 쉽게 떠오르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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