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

이중직 목회자 후보생에게 고함

habiru 2019. 12. 22. 22:30


서른이란 나이는 사회에서 우쭐대기에는 너무나도 어리고, 그렇다고 실수를 저질렀을 때에 사람들의 용납을 마냥 기대하기에는 애매한 나이임에 틀림없다. 공자 선생께서는 서른을 이립(而立)이라고 하셨으니, "자신을 바로 세우는 나이"라고 볼 수 있다. 그렇다고 사회가 서른 살의 청년을 어른으로 대하는 것은 아니다. 아직은 도전의 여지가 남아있는 스물처럼 대할 때가 있다. 이는 아마도 건강한 남자라면 군대에 다녀오고, 대학도 졸업하여 취직 준비를 하는 나이가 그즈음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김광석 님의 "서른 즈음"의 그 "서른"과 지금의 "서른"은 조금은 다를 수도 있다. 여하튼 내가 서른에 대해 주절대는 까닭은 올해 내 나이가 만 서른이기 때문이다. 곧 2019년도 마무리되어 가기 때문에 나는 이제 서른의 문턱을 넘어설 것이다. 그때엔 더욱더 성공적인(?) 미래에 대한 부담감에 어깨가 무거워질 것이다.
(서론이 길어졌다. 이제부터 내가 진짜 하고 싶은 이야기다.) 한여름의 더위가 시작될 무렵, 나는 사회복지사로서 첫걸음을 내딛고 있었다. 나도 인정하지만 사회 초년생이라고 하기엔 다소 연식이 있던 나이였다. 그렇다고 내가 진로탐색에 소홀하거나 게을렀던 까닭에 사회진출이 늦어진 것만은 아니었다. 지학(志學)의 나이, 사춘기 시절의 나는 일찍이 학문에 뜻을 세웠다. "신학"을 해 보리라 마음 먹었던 것이다. 물론 사춘기 청소년에게 무슨 학문적 숭고함의 의지가 있으랴, 직업으로서의 목회자가 되고자 뜻을 두었던 것이다. 그렇게 대학에서 나는 "신학의 시녀"라던 철학을 전공하게 되었다. 그렇게 대학에 입학하여 그리스 철학을 공부할 때의 나는 소피스테스와 같은 직업 철학자를 저주하였고, 소크라테스 같은 배고픈 구도자가 되겠다고 어설프게 다짐하고는 하였다. 그 풋내 나는 고백을 하나님께서 어떻게 들으셨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때의 나는 사뭇 진지했다. 그렇게 시간이 지났다. 어느새 4년이란 시간은 흐르고 대학 출구 앞에 서 있었다. 나는 숭실(崇實)이라는 이름을 참 좋아했다. 나는 짐 엘리엇(Jim Elliot)처럼 창 끝에서 "숭고한 열매"가 되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 당시 무엇보다 나는 "아나뱁티스트들의 삶"에 감명을 받았다. 경전을 대하는 진중함, 교회에 임하는 진실함, 폭력에 맞서는 의연함! 나는 침례신학대학교의 교정에 들어서게 되었다. 그러나 현실은 기대에 이르지 못했다. 기대가 큰 만큼 실망이 컸다. 이는 특정 문제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일반적 현실에 적용되는 보편적 진리일 것이다. 그렇게 나는 신학적 공복감, 허기를 이기지 못하고, 목회학석사과정에 이어 신학석사과정을 밟게 되었다. 당시 나를 비롯한 대학원생들에게는 일종의 허세가 있었는데, "우리가 돈이 없지, 가오가 없냐!"를 외치던 영화 속 어떤 이의 대사같은 것이었다. 하지만 현실은 하나같이 궁상맞은 사람들뿐이었고, 몇몇 대형교회 담임목사의 자제들만이 궁상떨지 않을 수 있었다. 그러나 나에게는 목회자란 "배고픈 소크라테스"와 같아야 한다는 신념이 있었고, 이를 어길 수만은 없는 노릇이었다. 그렇게 나는 학교를 졸업했지만 양심에 따라 "직업적 종교인"인 소피스테스 같은 목회자가 될 수는 없었다. 하지만 기성교회 어느 곳에도 거리의 철학자인 소크라테스가 활동할 곳이 없어 보였고, 나는 광야로 나서게 되었다. 이것이 지난 2월의 일이다.
2019년 2월, 학교를 졸업하는 것과 같은 시기에 전도사로 사역했던 곳의 예배당 문을 박차고 나섰다. 가진 것이라고는 학위뿐, 가진 것마저 철학과 신학에 관한 것이었기 때문에 먹고 살만한 기술과 관련된 것은 아니었다. 나는 목회 이중직이 배고픈 소크라테스의 정체성을 지켜줄 만한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그것은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생각해 보니 소크라테스에겐 크산티페가 있었다. [물론 소크라테스를 면박하긴 하겠지만] 크산티페는 악녀가 아니라, 소크라테스의 알량한 자존심을 지켜줄 식구(食口)였다. 끼니를 같이한다는 말처럼 애틋한 말이 어디 있겠는가. 배고픈 소크라테스라지만, 크산티페 없이는 그도 거리의 철학자로 활동할 수 없었던 것이다. 영혼의 구속을 해방하는 독배를 마시기 전까지는 그도 육체를 가지고 먹고살아야만 하는 사람이었으니 당연한 일이다. 어쩌면 크산티페 없이는 소크라테스도 언젠가 직업적 철학자, 소피스테스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유능한 철학자가 탄생하기까지는 가족의 헌신이 필요하다.
하지만 나란 존재는, 크산티페같은 아내도 없을뿐더러 가족의 경제적 지원을 기대하기엔 어려운 "서른"의 사회인이었던 것이다. 그렇게 나는 단기간 습득한 사회복지사 자격으로 직업 전선에 뛰어들었던 것이다. 하지만 어느 누구라도 그렇겠지만 나 역시도 생계 수단으로만 사회복지사를 택한 물질적 사람이라고 비난을 받고 싶은 마음은 없다. 나의 선택은 목회자적 소명을 지키기에 사회복지사의 일이 그렇게 이질적으로 보이지 않았기 때문에 기인한 것이었다. 그러나 본연의 소명을 목회자로 생각하기에 몸과 정신이 피폐해지고 고달파졌다. 아마도 소크라테스도 철학자로서 본연의 소명을 지키기 위해 다른 일을 하지 않았던 까닭이 여기에 있었던 것이었으리라! 더구나 나에겐 소크라테스와 같은 전사적 체력이나 의연함이 없다. 나는 그저 평범한 목회자 후보생일 뿐이다. 나에게 있어서 두 가지 직업적 업무를 성실하게 동시에 해내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솔직히 말해, 목회자나 직업인으로서 한 가지의 [혹은 두 가지의] 성실의 의무를 위반했을 가능성이 농후하다.
각설하자면, 목회자가 이중직을 가진다는 것은 말처럼 쉬운 것이 아니다. 물리적인 시간이나 정신의 근지구력, 여러 요소가 받쳐져야만 가능한 것이 이중직인 것이다. 더군다나 목회에는 영혼을 다루는 섬세한 기술이 요구된다. 반 년째, 이중직을 경험하면서 얻은 결론은 다음과 같다. 소크라테스도 단념한 이중직을 목회자에게 요구하지 말라. 그리고 이런 비정상적인 요구를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게 만드는 요청에 목회자는 신중하라는 것이다. 내가 알기론 유대-기독교의 역사에서 목회 이중직이 지금처럼 화두가 된 적은 없었다. 성직자가 아닌 수도자도 사막에 은거하거나 거리에서 평신도 운동을 주도했지만, 그들도 빌어먹었으며 그것을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축복을 빌어 주는 것으로 그들은 그들의 도리를 다했다. 오해하지 않아야 할 것은 목회자의 노동이 불필요하다는 말이 아니다. 목회자도 목회에 대한 노동을 하면 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외의 노동은 과분한 것이다. 잠시 바울이 천막 치는 일을 했던 것을 일반화시킬 수는 없을 것은, 그 역시도 순회 전도자였던 것을 기억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향한 불만이 쌓이고 해소할 길이 없어 하소연하는 심정으로 글을 적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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