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한국침례회 소속의 목사로 안수를 받기 위해서는, 대개 안수 후보자가 봉사하는 교회가 소속된 지방회에서 일련의 과정을 거쳐야 한다. 대략적인 과정은 다음과 같다. (1)목사 후보자에 대한 시취 청원서를 소속교회의 사무처리회(성도총회)에서 소속 지방회에 제출하여 심사에 들어간다. (2)지방회 목사시취위원회에서 목사 후보자의 이력 및 자기소개서를 살펴본 후, 간단한 질의 및 면접을 진행한다. (3)면접 후, 목사 후보자의 신학성을 검증하기 위한 소논문 주제를 위원당 1개 과목을 배정해 제출하도록 한다. 목사 후보자는 조직신학, 성서신학 등의 이론신학과 실천신학 내용으로 7~8편의 소논문을 작성·제출한다. (4)제출된 논문은 시취위원회에서 검토한 후, 면접을 통해 목사 후보자의 자질을 검증한다. 목회자의 자질, 목회 신학, 신학성에 대한 질의 등이 면접 대상이 된다. (5)이 과정을 통해 목사로서 적격하다고 판단되면, 지방회에서 시취를 허한다. (6)교단의 특성 상, 개교회의 집합을 지방회, 지방회의 집합을 교단 총회로 보는 경향이 있다. 따라서 교단에서는 개교회와 지방회의 목사 시취를 대개 인정하는 시스템이다. 특별한 결격 사유가 없다면 교단의 인준으로 행정적인 절차는 마무리된다. (7)목사 후보자가 소속된 교회에서 안수식을 진행함으로써 목회자 안수가 대외적으로 마무리된다.
현재 (3)번 과정을 진행하며 조직신학 파트의 소논문을 쓰는 중이다. 엄밀하게 말하면, 무언가를 주장하고 논하라는 취지보다는 목회자로서 목회 신학을 정리하고 정립하라는 취지에 가깝다. 이에 학교에서 공부했던 교재를 중심으로 생각을 정리하다가 난제에 봉착했다.
"십자가의 속죄(satisfactio)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막상 이를 어떻게 정리할 것인지 당황스럽다. 이차문헌에서나 접한 지라르(Rene Girard)의 희생양 이론으로 말하기엔 아직 이해가 부족한 듯하다. 그렇다고 죄와 의의 전가로 받아들이기에도 신학적인 부분에서 걸리는 부분이 있다. "죄의 전가"까지는 납득이 되나, "의의 전가"가 어떤 방식으로 가능한지 논지를 정확하게 모르기 때문이다-신앙이 아닌, 신학적인 기술의 문제라는 점에서-. 어느 정도 이 문제 제기는 톰 라이트에게 동의하는 듯하다.
이에 조직신학 주교재로 사용했던 푈만의 <교의학>을 뒤적였다. 그는 학자들의 견해를 다양하게 소개하고 있었다. 지도교수님께서는 "선택은 사상"이라는 말씀을 자주 하시고는 했는데, 어떤 선택을 해야 할 것인지 고민이다. 푈만의 분류에 따르면, 나로서는 계몽주의 혹은 자유주의의 주장에 동의하기는 힘들 것 같고, (바르트에 가까우나, 죌레의 문제제기에 수긍하는 까닭에) 바르트와 죌레의 중간 정도가 되지 않을까 한다. 좋은 문제를 내 주신 목사님께 감사드려야 할 듯하다. 그리고 나중에 문제를 제출하신 목사님께 여쭤봐야 할 것 같다.
"목사님, 속죄에 대한 가르침 부탁드립니다."
신약성서는 분명히 그리스도의 죽음을 속죄의 희생으로 이해한다.(마 10:45; 요 2:2; 롬 3:25; 5:8 이하; 갈 3:13; 히브리서) 하나님은 화해의 대상이 아니라, 궁극적으로 화해의 주체다.(고후 5:18) 십자가 행위는 하나님의 사랑으로 인도하는 것이 아니라, 거꾸로 하나님의 사랑으로부터 나온다. (고후 5:18 이하) 하나님의 본질은 오직 사랑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요일 4:8) 하나님은 피를 보아야만 용서하는 잔인한 몰록이 아니다. 하나님은 마음이 내키는 대로 난폭한 복수를 행하는 하나님이 아니다. 이런 하나님은 참으로 성서가 말하는 사랑의 하나님(렘 31:3; 요일 4:8)과 모순된다.
신약성서는 분명히 고대의 속죄 표상으로부터 출발한다. 하지만 이러한 표상은 모순에 봉착한다. 왜냐하면 궁극적으로 십자가에서 하나님에게 희생 제물이 바쳐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자신의 아들 안에서 자기 자신을 희생 제물로 바치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자신의 아들과 동일한 존재다. 협정신조의 증언에 따르면 십자가에서 "하나님은 우리를 위해 죽었다." 십자가에 달린 하나님은 우리 인간이 마땅히 받아야 할 심판을 자신에게 돌린다. 이로 말미암아 속죄를 요구하는 고대의 속죄 권리는 마지막으로 -하지만 거꾸로- 적용됨으로써 뒤집어진다. 아니 그것은 파괴되어 버린다. 심판의 용어를 쓰지 않고 말한다면, 하나님은 우리를 위해 죽음 속으로 들어간다. 하나님은 우리를 이처럼 지극히 사랑하신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이 심판을 통해 우리를 의롭게 한다는 생각을 포기할 수 있겠는가? 아니다. 심판이 없는 은총, 심판을 통과하지 않은 은총, 율법이 없는 복음은 진지하지 못할 것이다. 은총은 오직 심판을 통과한 은총이지, 관대하고 자비를 베푸는 값싼 은총이 아니다. 만약 심판의 차원이 없다면, 은총은 값싼 떨이상품이 될 것이다. 오직 하나님의 심판 아래서 두려워할 때, 나는 하나님이 권리보다 은총을 먼저 선택하였다는 사실을 이해할 수 없는 기적으로 경험한다. 만약 하나님의 거룩함이 없다면, 하나님의 사랑은 진지하지 못한 것이 될 것이다. 은총은 값싼 은총이 아니라 심판을 통과한 은총이기 때문에 십자가에서 일어난 속죄의 표상은 포기될 수 없다. 십자가에서 일어난 그리스도의 속죄 표상을 부정하는 계몽주의의 하나님 이미지를 우리는 여기서 경고해야 할 것이다.
바르트는 십자가에서 일어난 그리스도의 속죄의 신학적 필연성을 누구보다 강하게 항상 강조한다. 예수 그리스도는 "종"으로서 "주님"이다. "인간의 형제가 되기 위해, 범죄자 옆에 서기 위해, 그래서 그 대신에 자기 자신을 심판함으로써 그를 심판하기 위해 자신을 비우고 낮추는 행위 속에서 영원한 아들 예수 그리스도는 자신의 영원한 아버지에게 순종하였다." 심판자가 "우리 대신에 심판을 받는 자가 되었다는 바로 이 사실"에 모든 신학은 달려 있다. "이 좁은 문은 결코 지나칠 수 없다. 이 좁은 길 외에 다른 길은 없다."
바르트가 "우리가 없이-우리를 위해" 일어난 배타적인 속죄론에 관심을 기울인다면, 죌레는 그와 반대로 포괄적 대리를 주장한다. 이 이론은 인간의 실존적 참여를 윤리적 결론에 이르기까지 강조하지만, 신인협동설의 위험에 빠질 우려도 여전히 존재한다. 죌레의 대리 이론의 배후에는 그리스도를 "진정한 스승"으로 보는 생각이 존재한다. 진정한 스승 그리스도는 우리를 미성숙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성숙하게 만든다. 그리고 그는 우리는 "자신의 학교에서 졸업시켜 자신의 나라로 데려가기를" 원한다.
죌레는 대체(代替)와 대리(代理)의 차이점으로부터 출발한다. 오늘날 우리의 물질적인 세계에서 흔히 볼 수 있듯이, "대체란 죽은 존재, 물질적인, 또는 물질로 변한 존재의 완전한 교환이다. 이와는 정반대로 대리란 인간이 인간을 위해 잠정적으로 개입하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대체를 수행한 것이 아니라, 대리를 수행한다. 그리스도는 "대용인간"이 아니라, "대리자"다. 왜냐하면 인간은 "대체될 수는 없지만, 대리될 수는 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는 인간의 인격을 박탈하기를 원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을 다시금 인격적인 존재로 만들기를 원한다. 따라서 "그리스도가 우리를 위해 실천한 개입은" 단지 불완전하고 대리적인 대리일 따름이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는 대체될 수 없는 인간을 위해 행동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는 우리를 위해, 다시 말하면, 우리 대신에 죽었다. 하지만 우리는 스스로 죽기를 배워야 한다." 그리스도는 하나님 앞에서 오직 "잠정적으로만" 대리하기 때문에 우리도 하나님 앞에서 "세상"을 위해 "대리해야" 한다.
(...) 우리는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체험되는 십자가는 존재하지 않고, 오직 실천되어야 할 십자가만이 존재한다. 또한 우리는 1968년에 개최된 개신교연맹(EKU)의 선언문처럼 다음과 같이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통해 세상의 구원을 위해 충분히 행동했기 때문에 우리가 세상의 복리를 위해 아무리 노력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신약성서에는 대리적 속죄 외에 십자가에 대한 다른 해석도 존재한다. 마가는 시편의 몇몇 구절에 따라서 십자가의 죽음을 "의로운 자의 죽음"으로 해석하며, 바울은 십자가의 죽음을 "통치의 교체"로 해석한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롬 14:8)
- H.G.푈만, <교의학(Abriss der Dogmatik)>, 이신건 역, 3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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