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사 안수를 위한 준비를 하며, 목회에 관한 이런저런 책들을 보고 있습니다. 요즘은 교회의 예전적 실천들(practices)에 관심이 생겨 기독교 예배의 양식, 요소 등에 관한 내용을 주의 깊게 보고는 합니다. 유대인에겐 '율법의 행위'가 유대인으로서의 표식(sign)이듯이, 기독교인에겐 '주일 예배'가 기독교인의 표식이라고 생각하기에 눈이 가는 듯합니다.
흔히들 기독교 예배를 '말씀'과 '성찬'으로 구성되었다고 합니다. 종교개혁의 후예들 사이에서는 '말씀'에 대한 이견은 없을 듯합니다. 저교회파나 고교회파 사이에 차이는 있겠지만, '말씀'을 강조하는 태도는 동일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성찬'이 교회 안에서 주의 만찬, 애찬 등의 용어로 다양하게 사용되는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이 문제에서는 이하동문이 없습니다. 신학교 때, 지루해했던 주제 중 하나가 이 문제였습니다. 화체설, 공재설, 영적임재설, 상징설, 기념설 등등의 신학 논쟁에 별다른 감흥이 일지 않았습니다. 논쟁 자체가 의미 없다는 것이 아니라, (종교개혁 시기가 아닌) 21세기 대한민국 교회에서 이 논쟁이 갖는 의의를 찾기가 어려웠기 때문입니다. 지적 허영심을 만족시키거나 교단신학의 든든한 우군이 되는 것이 아니고서야 성찬 논쟁에 참전하는 것이 도통 무슨 의미가 있는지 여전히 잘 모르겠습니다.
우리는 높은 실업률과 더해가는 빈부격차, 낮은 임금 대비 높은 물가 상승률, 여전히 어려운 내 집 마련, 가속화되는 기후 위기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저 역시도 몇 개월째 백수입니다ㅎㅎ) 실상 '먹고 살기'가 참으로 어렵습니다. 저출생의 문제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근본적으로 먹고사는 문제가 버겁기 때문입니다.
교회에서는 서로를 형제, 자매로 부르며 한 가족이라고 합니다만, 대개 경제 공동체로서의 가족의 의미는 결여되어 있습니다. 서로의 경제 사정, 수입을 공개하는 것은 불가능한 얘기입니다. 어쩌면 괜찮은 이웃이 될 수는 있지만, 식구(食口)가 되기는 어렵습니다. 교회 내에서 일부 취약계층을 선정해 장학금이나 생계비를 지원하기는 하지만, 가족보다는 도움이 필요한 이들을 지원하는 구빈책에 가깝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습니다.
오늘날 성찬은 어떤 의미가 있을지 생각해 봅니다. 저로서는 더 이상 성찬의 지식이 지적 유희와 만족만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듭니다. 성찬은 하나의 식탁에 둘러앉아 나누는 실체입니다. 천장에 매달린 굴비를 보며 식사할 수 없듯이, 주님을 바라만 보며 성찬을 할 때에 허기가 달래질지 의문입니다.
궁핍한 상이라도 함께 둘러앉아 나누는 식사의 실천(practice)이 성찬이 될 수 없을까, 생각합니다. 그래서 교회 개척을 한다면, 밥을 먹는 예배를 드리고 싶습니다. 말씀 읽기와 설교, 그 이후에 감사의 기도를 드린 후, 함께 식사하는 예배라면 괜찮지 않을까 상상해 봅니다. 성찬을 실천한다면, 어쩌면 괜찮은 식구가 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 회로를 돌려봅니다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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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에 나오는 말씀(행 20:7)이나 고린도전서와 같은 바울의 편지들 가운데서 언뜻 추정해 볼 수 있는 것 말고, 여기 교회 주일예배에 대한 가장 오래된 언급이 있다. 순교자 유스티누스의 <제일 변증서>(First Apology of Jusin Martyr)에 나오는 것인데, 주후 90년경 교회예배 모습을 이렇게 그려 보여주고 있다:
[1] 주일이라고 부르는 날에 도시 안이나 시골에 사는 모든 사람들이 한 곳에 모인다. [2] 시간이 있는 대로 사도들의 전기(memoirs)나 예언자들의 글을 읽는다. [3] 그리고 난 다음, 읽기를 마치면, 회장(pesident)은 강론에서 사람들에게 이들을 본받아 덕의 실천을 권면하고 권유한다. [4] 그 다음, 모두 함께 일어서서 기도드린다. [5] 그리고, 이미 말한 바와 같이, 기도드리기를 마치면 빵과 물 탄 포도주를 내 놓는다; [6] 회장은 또한 그의 능력에 따라 감사기도를 드리고, 사람들은 아멘으로 동의한다(assent). [7] 축사한(eucharized) 빵과 포도주를 각 사람에게 나누어 받게 하고, 집사들이 결석자에게도 갖다 준다. 부유한 사람들은 그들이 원하는 대로 합당하게 생각되는 바를 헌금하고, 모은 헌금은 회장에게 맡겨서, 고아와 과부, 질병이나 그 밖의 다른 이유로 도움이 필요한 사람, 감옥에 갇힌 사람, 우리 가운데 거류하는 외국인들을 돌보게 한다. 한 마디로 회장은 곤궁에 처해 있는 모든 사람의 후견인(curate)이다.
우리는 여기서 교회의 주일 예배모임을 위한 기본양식을 찾아 볼 수 있다 교회 역사의 이 시점에서 보면, 정해진 예식문은 없다. 다만 정해진 행동양식이 있을 뿐이다.
- 윌리엄 윌리몬, <목회자>, 최종수 역(서울: 한국기독교연구소, 2017), 11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