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배 자료/묵상

사순절을 보내며: 삶과 죽음에 대한 묵상

habiru 2020. 3. 7. 22:09

사순절이라 함은 부활절을 기준으로 한 40일의 시간이지만, 대개 사순절의 분위기는 경쾌한 왈츠가 아닌 레퀴엠의 엄숙함에 더욱 가까운 것이 사실이다. 이 곡이 끝나는 후반부에 엄청난 반전이 있다는 것을 모든 사람이 알고 있을 테지만, 더욱 극적인 반전을 위해 청중들은 애통과 슬픔의 감정을 유지한다. 메시아의 대속적 수난과 죽음을 곱씹으며, 속량의 깊이를 헤아리는 것이다. 그래서 교회에서 매해 3월은 장송곡이 끊임없이 울리는 시기이기도 하다. 그러나 공교롭게도 3월 6일을 생일로 삼고 있는 “나”는, 의도하지 않게 해마다 죽음을 묵상하는 중에도 삶에 대해 생각해 보고는 한다.

2020년 3월 6일, 나는 어김없이 엄마로부터 “생일 축하해”라는 메시지를 읽으며 하루를 시작했다. 원체 자기 고집이 센 편이라, 나는 누군가로부터 지시나 훈수 받는 것을 매우 싫어할뿐더러 잘 따르지도 않는 편이다. 그러나 아침부터 “살아 있으라”(生命; 생명)라는 명령을 여태껏 잘 수행했다는 이유만으로 축하를 받는 것은 다른 일이다. 그렇게 남다른 하루가 시작되었다. 그러나 이내 “삶”에 대한 묵상은 “죽음”에 대한 묵상으로 바뀌어야 했다. 사순절은 3월 6일에도 이어지기 때문이다.

평범하게 직장에서 하루가 시작되었다. 아니, 더욱 바쁜 하루를 보내야만 했다. 정신없이 오전 일과를 마치고, 오후 2시경 어르신을 호출했다.

“000 어르신, 오늘은 제가 목욕 시켜 드릴게요. 저랑 같이 샤워실로 가시지요.”

내가 일하는 장기요양기관에서는 매주 금요일마다 남자 어르신들의 목욕 일정이 잡혀 있다. 나는 벌거벗은 노인을 바라보며 묻고는 한다.

“물은 차갑지 않으세요?”

샤워와 함께 피부의 각질 상태는 어떤지, 욕창은 없는지 관찰하는 것이 내가 해야 하는 일 중 하나다. 그래서 나는 적나라하게 그의 살갗을 응시하고는 한다. 깊게 패인 그의 주름을 보며 나는 노인이 겪어 온 삶의 시간과 그 무게를 헤아리고는 한다. 지금은 굳어 버린 그의 주름도 원래는 어미의 자궁에서 만들어진 신생(新生)의 살갗이었을 게다. 그러나 세월과 함께 원시(原始)의 살갗은 쇠함을 거듭하여, 이제는 나로 하여금 사그라짐과 죽음에 대해 연상하게 만들었다. 80이라는 햇수가 거뜬히 넘도록 버티고 있는 살갗의 내구성이 용해 보였다.

나는 그의 다리를 관찰했다. 노인의 다리에는 각질이라는 죽은 피부의 시체가 허옇게 일어나 있었고, 쇠약해진 괄약근에서는 누런 실변이 나오고 있었다. 나는 그것을 바라보며 나 자신도 죽음과 더욱 가까워지고 있다고 생각했다. 앙상하게 휘어 있는 노인의 다리를 보면서, 나는 더욱 그의 몸에 집중했다. 샴푸를 짜서 그의 머리를 감기고, 바디워시를 묻혀서 그의 온몸에 칠을 했다. 그리고 노인이 다시 태어나기를 바라며 나는 그의 몸에 따뜻한 물을 뿌렸다. 사람이 자궁에서 나는 따뜻한 물과 성령으로 태어나지 않고는 새 생명으로 거듭날 수 없기 때문이다(요 3:5). 김이 모락모락 일어나는 중에 노인의 발바닥에 마저 남은 거품을 묻히면서, 나는 노인의 피부에 오래도록 습기가 머물러 있기를 바랐다.

그때 나는 내 자신이 무척이나 낯설게 느껴졌다. 30년 전에 나신(裸身)으로 세상에 태어나, 이제는 나신의 노인을 씻기고 있는 내 모습을 생각하니 말할 수 없는 감정에 잠기게 되었다. 그처럼 삶과 죽음의 경계선은 불분명하다. 밀물에서 썰물로 바뀌는 간만(干滿)의 시간처럼, 나에게 그 30분은 삶과 죽음이 교차되는 시간처럼 느껴졌다. 죽음은 멀리 있지 않고 매우 가까운 곳에 있다는 교훈을 새삼 깨달았던 것이다.

마찬가지로 삶과 죽음은 단절이 아닌 연속에 가깝다. 연속되는 시간 위에 점으로 찍힌 사순절과 부활절은, 그리스도인에게 죽음이 결단코 끝이 아니라는 진리를 증언하고 있다. 마찬가지로 이는 살아도 인간답게 살지 않는 것이 죽음보다 못하다는 진리를 선언하는 것이다. 사순절 겸 생일을 맞이하여 참사람답게 살고, 참사람답게 죽을 수 있다면 좋겠다는 바람이 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