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배 자료/묵상

목사: 글자의 사람

habiru 2020. 2. 4. 21:36

 

영화 “두 교황(The Two Popes)”에 대한 짤막한 느낌을 기록하기 위해 글을 쓰던 것이 꽤나 길어졌다. 그런데 18시 45분 경, 영화를 감상한 후 느껴졌던 정서를 기록하며 길어졌던 글자 모두가 공기 중으로 증발해 산화해 버렸다. 블로그 어플의 오작동으로 기록이 날라 갔다. 글을 살리고 싶었으나 살릴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는 황망한 감정이 나를 찾아왔다. 다른 누군가를 위해 글을 쓰던 것은 아니지만, 긴 시간 적었던 글이 사라지자 열렬히 사랑했던 애인을 빼앗긴 것같은 상실감마저 든다. 그러나 아무리 후회한들 덧없는 것을 현자는 알고 있을 것이다. 대신 평소와 달리 공들여 손가락으로 타이핑하던 연고를 적는 것이 낫겠다는 생각이 든다.
보름 전, 계룡산 자락 산골짜기에 위치한 카페를 찾아갔다. 남매탑으로 가는 등산로를 가리키던 그곳, “산이정원”에서 나는 은퇴하신 교수님을 뵈었다. 신학대학원에 다니던 시절, 명석한 통찰력과 신선한 가르침으로 앞을 분간할 수 없었던 학생들의 시력을 밝히고자 부단히도 노력하셨던 교수님, 배움을 게을리하지 말 것을 자주 당부하셨던 교수님께서는, 방학마다 자신의 연구에 깊이 매진하셨고, 매 학기마다 새로운 가르침으로 제자들의 관성을 깨뜨리고자 도전하셨다.
한 번은 교수님께서는 일찌감치 세미나 수업을 계획하시면서 수강생들에게 소논문을 요구하셨던 적이 있다. 여름방학 동안에 에세이 주제를 골라 연구를 한 후 계획서를 제출하라, 그리고 소논문을 발표하기 전에 최소한 1회 이상 첨삭 지도를 받으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신학대학원생의 생리상, 그게 말처럼 쉬운 것이 아니라는 것쯤은 당신도 알고 계셨다. 전도사에게 7~8월은 온갖 교회 행사에 동원되어 정력이 소진되는 시기라 웬만한 시간을 기울이지 않고서야 연구가 불가능하기 때문이었다. 그럼에도 교수님께선 예비 수강생들을 독려하셨고 첨삭을 계획하셨다. 개강이 다가오기 전, 나는 우연히 도서관 앞에서 뵈었던 교수님께 멋쩍은 인사와 함께 수강을 취소하는 게 좋겠다는 생각을 말씀드렸다. 그때 교수님께선 인자하게 웃으시며 잔머리를 쓰지 말라, 늦지 않았으니 속히 준비하라 하시며 자리를 떠나셨다. 그렇게 나는 수강을 피할 수는 없었고 소논문까지 무사히 제출했던 기억이 있다. 물론 상대적으로 나보다 게을렀던 수강생들은 소논문 발표 이후 한 시간 동안 교수님의 신랄한 꾸지람을 들어야 했고, 수강생들은 민망한 마음을 갖는 한편, 쉬는 시간마다 발표자를 따로 위로해야 했다.
그러나 카페에서 뵈었던 교수님께선, 은퇴한 뒤로 선생 역할을 그만하고자 다짐하셨던 까닭인지 학문에 관한 이야기가 아닌, 평범한 화제로 대화를 이어가셨다. 그러한 까닭에 함께했던 일행도 진솔하게 자신들의 이야기를 꺼내 놓을 수 있었고, 나 역시도 어렵지 않게 현재 씨름하고 있는 고민에 대한 조언을 구할 수 있었다. 무엇보다 교수님께서 당부하셨던 것은 “글을 쓰는 것”이었다. 아마 1년 전이라면, 그 조언이 선문답처럼 들렸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이제는 “글자의 사람”이 되고자 애쓰는 자에게 그보다 더욱 현실적인 조언이 있을지 생각하기가 어렵게 느껴졌다. “인자한 미소”와 “진지한 조언”이 다소 역설적인 묘사일 수 있으나, 교수님은 분명 그렇게 말씀하셨다.
교수님의 표현에 따르면, 목사는 “글자의 사람”이다. 목사... 어쩌면 여태껏 나는 목사라는 호칭을 혐오했을 수도 있다. 이런 말이 있는지 모르겠다만, 일종의 타이틀포비아(title-phobia)를 가지고 있던 것이다. 그러나 그날만큼은 내게 목사라는 호칭이 낯설게 다가왔다. 사람들에 의해 오용되고 남용되었던 목사라는 호칭의 무게감이 제대로 계량되었던 것이다. 오염된 호칭이 아닌, 신선한 호칭을 접하자 목사에 대한 동경과 존경이 일면서 불현듯 나는 목사가 되고 싶어졌다. 교수님께서는 더 이상 어떤 부연설명을 하지 않으셨지만, 내 수준에서 새겨지는 바가 있어 정리를 위해 기록을 한다.
첫째, 목사가 “글자의 사람”으로 불리는 것은 “말의 사람”과 달리, 정제된 언어를 쓰는 사람이라는 것을 뜻한다. 정제된 언어를 쓰기 위해서는 사람과 사물, 사건에 대한 애정 어린 관찰이 선행되어야 한다. 제대로 된 관찰을 위해서는 긴 호흡이 필요하다. 오랜 시간, 지루하고 물리더라도 작가는 재빨리 시선을 옮길 수 없다. 관찰자에겐 오래도록 응시하는 인내력이 요구된다. 동방교회에서 이꼰(icon)을 바라보며 묵상하듯이 목사는 사람과 사물, 사건을 응시하는 인내심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일전에 소설가 김훈의 수필집을 읽은 기억이 떠올랐다. 낙동강 하류를 바라보며 강의 운치를 묘사하는 소설가에게는 범인들과는 격이 다른 관찰력이 있었다. 낙동강 그 자체를 포착하여 담아낸 그의 글에는 생명력이 있어 사진보다 더한 현실감과 구체성이 느껴졌다. 활자가 생명력을 갖고 살아 움직이는 환시를 일으키는 것을 보며 감탄했던 것을 잊을 수 없었다. 그러나 관찰은 선천적인 것이 아니요, 글을 쓰기 위한 후천적 훈련으로 만들어진다는 것이 교수님의 결론이었다.
둘째, 글은 말보다 무겁다. 말은 두뇌에서 혓바닥과 이 사이를 쉬이 통과하나, 글은 머리에서 손가락으로 오랜 시간이 거쳐져야 형성된다. 즉, 비물질의 정신이 글자로 화육하는 데에 긴 침묵의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머리와 손가락까지의 물리적 거리, 신경과 근육간의 물리적 시간에 비례하지 않고 활자를 조합하는 행위에는 기다림이 수반된다. 쌀이 감칠맛 나는 식초나 달짝지근한 막걸리가 되기 위해서는 발효의 과정이 필요하다. 포도가 좋은 와인이 되기 위해서도 숙성의 시간이 필요하다. 그것도 환경이 맞는 곳에서 발효되고 숙성되는 것이지, 조건이 맞지 않는 환경에서는 먹지 못하는 것으로 썩기 마련이다. 그래서 “글자의 사람”으로서 목사에겐 일종의 숙성 과정이 요구된다. 천사로부터 받은 말씀을 소화시키기 위해 밧모섬의 목사 요한에게 건강한 위장이 필요했던 것과 유사할 것이다. 봉인된 말씀을 글자로 쓰기 위해 목사 요한에게는 고통의 시간이 필요했던 것이다. 어쩌면 목사는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가르침 없이도 대중을 상대로 쉴 새 없이 가르침을 베풀어야 하는 저주를 받은 건지도 모른다. 그러나 본질상 목사는 “말의 사람”이 아니요, “글자의 사람”이다. 글자를 통해 목사는 정제되고 정화된다.
오래도록 학문에 정진하신 교수님께 비추었을 때, 그 조언에 더욱 심오한 의미가 담겨 있었을 것이라 생각하나 내가 느낄 수 있던 바는 여기까지다. 아마 시간이 흐르면 그 묘연했던 속뜻이 더욱 알려지리라. 꾸준히 글을 쓰는 연습을 하겠다는 바람이 일어나는 저녁, 교수님의 미소가 떠오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