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 누가복음 4:16-20
16. 예수께서는, 자기가 자라나신 나사렛에 오셔서, 늘 하시던 대로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셨다. 그는 성경을 읽으려고 일어서서
17. 예언자 이사야의 두루마리를 건네 받아서, 그것을 펴시어, 이런 말씀이 있는 데를 찾으셨다.
18. "주님의 영이 내게 내리셨다. 주님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셔서, 가난한 사람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게 하셨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셔서, 포로 된 사람들에게 해방을 선포하고, 눈먼 사람들에게 눈 뜸을 선포하고, 억눌린 사람들을 풀어 주고,
19. 주님의 은혜의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
20. 예수께서 두루마리를 말아서, 시중드는 사람에게 되돌려주시고, 앉으셨다. 회당에 있는 모든 사람의 눈은 예수께로 쏠렸다.

오늘은 설교보다는 조금은 편한 마음으로 준비했습니다.
기독교인들이 쓰는 방언이 몇 가지 있습니다. 교회 밖에서는 자주 쓰지 않는 말인데, 교회 내에서 통용되는 말이 있습니다. 교회 내에서 형제님, 자매님이라는 호칭을 쓰기도 하고, 감동했다는 표현을 은혜받았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또한 일요일을 주일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이런 방언을 많이 사용하다 보니 중고등학생 때까지 저는 일주일 단위로 나오는 교회의 알림 보도인 주보를, ‘주님의’ 혹은 ‘주일의’ 소식지로 착각하기도 했습니다.
어렸을 때엔, 주중에 구겨지지 않은 지폐가 있으면 잘 보관했다가 주일 헌금함에 넣으려고 했던 것도 생각이 납니다. 만약 마땅한 지폐가 없으면 은행에서 미리 새 돈으로 돈을 바꾸기도 하고, 그것도 안 되면 돈을 세탁해 다리미로 구겨진 지폐의 주름을 펴기 위해 다림질하던 어머니의 모습도 떠오릅니다. 그만큼 주일은 특별한 날이었고, 주일성수를 철저히 하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또한 교회당을 성전이라고 부르며 거룩한 공간으로 생각하며, 예배당에 앉아 기도하는 것을 잊지 않았습니다. 좋은 기억들이 많습니다만, 때로는 성전 건축이라는 거창한 이름으로 무리하게 교회당 건축을 하는 바람에 도리어 교인들이 상처받기도 하는 것도 심심찮게 기억합니다. 그만큼 주일이라는 “시간”과 교회당, 혹은 성전이라고 하는 “공간” 안에서 우리는 활동하며 살아왔기 때문에 이를 중심으로 우리 신앙이 구성이 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합니다.
비슷하게 누가복음 본문에서는 예수님께서 어떻게 안식일을 보내셨는지 설명해 줍니다. 예수님께서는 “늘 하시던 대로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셨다”라고 합니다. 그리고 무얼 하시느냐, 이사야의 어느 부분을 읽으셨습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의문점을 가질 수 있습니다. 주일이 아닌 안식일에, 성전도 아닌 회당에서 예수님이 무언가를 하셨다는 것입니다. 주일과 안식일에 관해서도 해야 될 이야기가 많지만, 오늘은 성전과 회당에 대해서만 얘기를 나누고자 합니다. 회당을 이야기하기 위해 먼저 성전을 이야기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다윗의 아들인 솔로몬이 예루살렘에 성전을 건축한 것을 알고 계실 겁니다. 그러나 그 이전에 사사 시대에는 자신의 거주지에서 제사를 드렸던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가나안에 정착하기 이전 광야에서 유리할 때에는 성막도 있었고, 유목민 족장으로 살았을 때는 텐트 내에서 어떤 종교의식을 치르기도 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니 여호와 하나님을 믿는 신앙의 장소가 어떤 특정한 장소에 제한될 수 없다는 것으로 판단됩니다. 그곳이 자신의 장막이든지 성막이든, 성전이든 어느 곳이든지 말입니다.
그럼에도 유대인에게 있어서 성전이라는 곳은 여호와 하나님의 임재가 머무는 장소로 유대 신앙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장소였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은 유대 신앙의 중심지로, 하나님이 거하시는 소우주이며, 하늘과 땅이 연결되는 지점이었습니다. 야곱이 벧엘에서 본 환상처럼, 하나님이 계시는 하늘과 땅을 연결한 사다리로 천사들이 왕래하는 곳이 성전이었습니다. 그러니 하늘과 소통할 수 있는 지성소는 구별된 장소로서 대제사장만 출입이 가능했습니다. 성전 건물 외부의 제단에서는 제사가 드려지고는 했습니다.
그런데 기원전 586년 성전이 바빌로니아가 예루살렘을 함락시키면서 성전이 파괴되기에 이릅니다. 예루살렘 성전에서 드리던 제사는 더 이상 드릴 수 없게 되었고, 자연스레 제의와 제사도 사라지게 됩니다. 유대인 입장에서는 생각만 해도 끔찍한 상황이 아니겠습니까. 하나님의 영이 임재하신다고 믿었던 성전이 이방인들에 의해 더럽혀지고 무너져버립니다. 유대 신앙에 있어서 심각한 공황, 아노미 상태가 발생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입니다. 더욱이 고대사회에서 지도자는 “신의 권위”를 통해 국가의 중차대한 대소사를 결정하기도 했습니다. 따라서 전쟁에 출정하기 이전에 국가를 위해 일하는 제사장을 통해 신의 의중을 구하는 것은 부끄러운 행동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니 바빌로니아가 메소포타미아 지역을 정벌하기 위해서는 국가 수호신의 가호가 필요했던 것입니다. 한 마디로 바빌로니아 나라를 수호하는 마르둑 신이 남유다를 수호하는 여호와와의 전쟁에서 이긴 것입니다.
물론 오래전부터 남유다 내부에서는 예루살렘 성전 파괴의 징조가 있었습니다. 이미 수많은 예언자들이 유대 지도자와 민족의 죄악을 신랄하게 비판하며 경고하고 있었고, 회개하라는 메시지를 수없이 반복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남유다 망국의 운명은 되돌릴 수 없었습니다. 도시의 함락과 함께 성전이 파괴된 시점, 예레미야 선지자의 눈물 어린 경고가 새삼 생각납니다. 그럼에도 국가만 아니라 유대 신앙의 근간인 예루살렘 성전이 무너졌으니 그것 또한 큰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어떻게든 성전 재건을 하려고 해도 바빌로니아든, 또한 비슷한 처지의 이웃 국가의 압박 때문에 함락당해 무너진 도시에서 성전을 건축하는 것이 어려울 수밖에 없습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어떻게든 성전을 재건하고 보수하려고 하시겠습니까? 스룹바벨이나 에스라, 느헤미야처럼 성전 재건을 위한 결사체가 결성될 수 있습니다. 어쩌면 더 급진적으로는 무장혁명을 통해 성전을 보수하려고 할 수 있습니다. 신구약 중간기 시대에는 그리스인들에 의해 더럽혀진 성전을 정결케 하려고 했던 유다 항쟁이 일어나기도 했습니다. 그들 모두 예루살렘 성전에 대한 그리움이 남아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또하 현실주의자도 있습니다. 그들은 사라진 성전을 대신할 다른 방법을 찾기 이릅니다. 성전을 대체할 무언가를 찾는 것입니다. 그래서 탄생하게 된 것이 회당입니다.
성전을 대신하여 회당은 유대 신앙을 보전하고 전수할 수 있는 기능을 하게 됩니다. 민족 지도자를 포함해 많은 사람들이 바빌로니아로 포로가 되어 끌려가 이주한 상황에서 회당은 더욱 중요한 기능을 수행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전 세계로 흩어진 디아스포라에게 성전이 예루살렘에 다시 세워진들, 어렵게 정착한 새 터전을 버리고 예루살렘으로 귀향하지 않고서야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더구나 미국이나 유럽에서 태어나고 자란 유대인 2세, 3세가 예루살렘으로 돌아가 봐야 정착에 애를 먹을 것이 분명합니다.
그래서 유대 신앙은 회당에 모여 말씀 중심의 종교로 변모해 나갑니다. 기본적으로 회당은 우리나라의 향교나 서당과 비슷하다고 보시면 됩니다. 유대인이 거주하는 곳이라면 어느 곳에서나 세워질 수 있습니다. 그렇게 유대의 신앙은 성전 중심의 제의가 아닌, 회당 중심의 말씀과 나눔의 예전으로 신앙이 한 단계 발전하게 되는 것입니다. 예루살렘의 소수 엘리트 제사장에 의한 종교가 아니라, 평범한 유대 사람의 종교가 되는 것입니다. 회당이 만들어지기 위해서는 기본적으로 유대인 남성 10명만 모이면 된다고 합니다. 건물이 아닌, 사람 중심인 것이지요. 더 이상 제사장이 필요하지 않고, 성경 두루마리를 읽고 해석할 수 있는 사람만 있다면 회당에서 드리는 말씀 중심의 예전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회당은 안식일에만 사용되는 것이 아니라, 매일 아침과 점심, 저녁에 예배를 드리는 장소이자 기도와 학습, 교제를 나누는 가능을 갖추 됩니다. 그래서 누가복음 본문에서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제사를 드리시는 게 아니라, 회당에 가서 말씀을 낭독하고 가르치는 선생님으로 활약하실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어쩌면 저는 성전 중심에서 회당 중심의 신앙으로 변하는 과도기에 우리도 처한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유대인들이 예루살렘 성전에 가야만 하나님을 대면할 것이라는 신앙을 대신해, 이제는 비대면이지만 우리도 교회당이 아닌 거처에서 드리는 예배와 신앙으로 변모가 필요해 보입니다. 비대면이 일상화되는 시기에 대면으로 드리는 예전 의식과 신앙을 고수할 것만이 아니라, 말씀과 생활 중심의 신앙으로 한 단계 발전, 성장할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 합니다. 교회당과 예배 의식이 이제 구시대적이고 낡은 것이며, 이제 더 이상 필요 없고, 가치 없다는 말이 아닙니다. 장소와 의식에 따라 좌지우지되지 않고, 우리 신앙이 퇴보하지 않고 성장하고 발전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저는 그러한 점에서 회당 중심의 유대 신앙처럼 이제 우리의 신앙도 성경연구와 학습, 교제를 통해 성장할 수 있는 발판이 마련되었다고 생각합니다. 목회자 한 명에 의해 집도되고 관리되는 예배가 아니라, 모두가 함께 예배에 참여하여 성경을 읽고 나누며, 기도하며 교제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어떤 방식을 통해 그것을 이루게 될지는 시간과 고민이 필요하지만, 이제는 회피할 수 없는 시간이 가까이 온 것 같습니다. 특별히, 이야기침례교회에서는 각자 자신이 갖고 있는 신앙과 의견을 이야기하며, 함께 배워가는 그런 모습이 적절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함께 생각해 보면 좋겠습니다.
로렌스 형제
하나님, 당신은 언제나 제 가까이 계십니다. 제가 살아가며 겪는 모든 일들이 오직 당신께 바치는 순종이기를 원합니다. 하지만, 제가 그러고자 할 때에, 당신의 임재를 은총으로 내려주십시오. 이를 이루기 위하여, 제가 하는 일을 도와주시고 일의 열매를 당신께 바치오니 받아주시며 언제 어디서나 제 사랑을 당신께로 향하게 하여 주소서.
하나님, 여기 제가 있습니다. 제 가슴을 당신께 바치오니, 당신 가슴에 맞추어 꼴을 빚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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