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 5:9~12, 새번역]
9. 주님께서 여호수아에게 말씀하셨다. “너희가 이집트에서 받은 수치를, 오늘 내가 없애버렸다.” 그리하여 그 곳 이름을 오늘까지 길갈이라고 한다.
10. 이스라엘 자손은 길갈에 진을 치고, 그 달 열나흗날 저녁에 여리고 근방 평야에서 유월절을 지켰다.
11. 유월절 다음날, 그들은 그 땅의 소출을 먹었다. 바로 그 날에, 그들은 누룩을 넣지 않는 빵과 볶은 곡식을 먹었다.
12. 그 땅의 소출을 먹은 다음날부터 만나가 그쳐서, 이스라엘 자손은 더 이상 만나를 얻지 못하였다. 그들은 그 해에 가나안 땅에서 나는 것을 먹었다.

1. 오랜만입니다. 코로나로 고생한 분도 있었지만, 그럼에도 건강한 모습으로 만날 수 있어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요새는 코로나에 걸리지 않은 사람이라면, 슈퍼 면역자 혹은 운이 엄청나게 좋은 사람, 아니면 인간관계에 문제가 있는 사람이라는 얘기도 들립니다. 저를 비롯해 몇몇 분은 인간관계를 되돌아보시길 추천드립니다.
2. 교회 전통에서는 매해 3~4월 시기를 사순절로 보내고 있습니다. 사순절이란 사순(四旬), 즉 ‘40’이라는 수를 기념하는 절기입니다. 교회에서는 ‘40’이라는 숫자에 상징적인 의미가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이집트를 떠난 이스라엘 민족이 ‘40년’ 동안 ‘광야’에서 유리했고, 예수님께서도 ‘40일’ 동안 성령에 이끌리어 ‘광야’에서 생활하셨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40’이라는 시간과 ‘광야’라는 장소는 분리될 수 없습니다. 사람이 살기엔 적합하지 않은 건조한 광야를 헤쳐나가는 것은 고통과 수난, 시험의 연속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40’이라는 수는 고통과 인내를 상징하는 시간이 되었습니다. 때문에 교회에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매달려 돌아가시고 부활하신 날짜를 역순으로 한 40일을 사순절로 지켰던 것입니다. 즉, 그리스도의 수난과 죽음을 기억하며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 된 그리스도인도 사순절 기간에 자신을 성찰하고 되돌아보는 것입니다.
3. 어느 누구에게나 ‘흑역사’가 있습니다. 사춘기 시절, 이불 팡팡을 할 만한 흑역사가 있을 것입니다. 너무나도 부끄럽고 수치스러워서 잊고 싶어 하지만 잊히지 않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흑역사는 개인뿐 아니라, 민족과 국가 차원에서도 있습니다. 한국 근현대사에서 제주 4.3. 사건과 여순 사건은 대표적 흑역사 중 하나입니다. 이 와중에 한국교회도 4.3. 사건에서 서북청년단으로 개입한 부분이 있기 때문에 한국교회의 흑역사로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4. 마찬가지로 이스라엘 민족에게도 흑역사가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400년 이상을 이집트에 기거하며 노예생활을 했다고 합니다. 어릴 때, 저는 가끔 “천방지추마고피” 중 추 씨라는 이유로 ‘백정 출신 아니냐’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그럼 어린 마음에 부끄럽고 수치스러운 감정에 휩싸이곤 했습니다. 출신 성분이 천하다는 소리를 들을 때면 어느 누구나 기분 좋을 리 없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도 이집트에서 했던 노예생활을 자랑스럽게 여길 수 없었습니다.
5. 그럼에도 본문 9절의 하나님께서는 굳이 이스라엘의 흑역사를 상기시키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들에게 이집트에서의 기억은 수치스러울 뿐 아니라 슬픈 역사이기도 했습니다. 이스라엘을 해방시킬 민족 지도자 모세가 태어나기 전에 이스라엘 사람을 대상으로 집단적인 영아살해가 있었습니다. 이집트인들에 의해 이스라엘 사람들은 억울하게 인종청소(genocide)를 당했습니다. 우리의 아들과 딸 들이 이유 없이 죽어야 했으니 슬픈 일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를 기억시키며 가나안으로 들어가는 입구 지역에 “길갈”이라는 이름을 붙여 주셨습니다. 이스라엘에겐 잊고 싶은 흑역사를 기억하는 장치로 길갈은 불리게 됩니다. 갈릴리에서 자라나신 예수님을 생각하면 “길갈”과 “갈릴리”의 어근이 같다는 것도 참 재밌는 점입니다. “그 곳 이름을 오늘까지 길갈이라고 한다.”라는 후대 역사가의 기록은 슬픈 과거를 기억하게 하는 장치가 이스라엘 안에서 여전히 작동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6. 또한 본문 10절 이하에서 길갈에서 지키게 된 유월절과 무교절 예식은 과거의 역사와 현재 진행 중인 역사를 연결하는 예식이 됩니다. 이스라엘 민족에게 유월절과 무교절은 이스라엘의 대표적인 절기 중 하나입니다. 유월절은 이집트에서 받은 수치, 고통, 죽음을 기억하는 절기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이집트에서 보낸 마지막 밤엔 누룩 넣지 않은 떡과 쓴 나물을 먹었습니다. 그들은 “허리에 띠를 띠고, 발에 신을 신고, 손에 지팡이를 들고, 서둘러서 먹어”야 했습니다(출 12:11). 얼마나 급했으면 누룩을 넣어 부푸는 시간마저 아껴서 식사해야 했을지 생각해 봅니다(호빵 만들어 먹을 시간이 없어서 부침개를 재빨리 부쳐 먹으라는 느낌입니다). 금방 떠나야 할 채비를 마친 나그네처럼 그들은 신을 신은 채로, 허리띠를 매고 지팡이를 든 채로 서둘러 먹어야 했습니다. 마치 그들은 기차역에서 허겁지겁 오뎅을 욱여넣는 사람들의 모습과 같습니다. 뜨거워서 입천장은 까지고, 생선살보단 퍽퍽한 밀가루에 가까운 오뎅이 한꺼번에 위장 속으로 들어가는 것을 떠올려 보십시오. 급하게 먹은 탓에 배부름을 위장한 더부룩함으로 허기를 채우는 모습 말입니다. 죽음의 사자가 지나간 저녁 이후, 이스라엘은 얼른 죽음과 수치의 땅에서 떠나야 했습니다. 그날 이후, 이스라엘 사람들은 쓴 나물을 먹으면서 그들이 겪었던 고통의 쓴 맛을 기억했습니다.
7. 그렇지만 길갈에서의 유월절과 무교절은 특별합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유월절과 무교절을 지키면서 이집트에서의 흑역사를 기억했습니다. 그렇지만 그들은 이제는 이집트가 아닌, 가나안 지역에서 난 곡식을 먹습니다. 즉, 현재진행 중인 역사의 터전에서 난 양식을 먹는 것입니다. 더 이상 과거가 아닌, 그들이 서 있고, 살아가야 할 곳에서 과거가 재창조되는 것입니다. 길갈에서의 그 날, 그들은 가나안에서 난 햇곡식을 먹음으로써 현재를 살아가고 미래를 살아가게 됩니다. 수치스러운 과거의 역사를 발판 삼아 현재와 미래의 역사를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집트 노예생활을 하며 났던 생채기와 상처는 더 이상 덮어야 할 흉터가 아닙니다. 이집트에서 받은 상처는 새 살이 돋아날 수 있는 곳이 됩니다. 그래서 길갈에서의 유월절, 무교절은 특별합니다. 아프고 상처받았던 과거가 족쇄가 아닌, 현재와 미래를 살아갈 자양분이 되는 것입니다. 과거, 현재, 미래는 이제 단절된 시간이 아니라, 선형적인 시간으로 통합됩니다.
8. 저는 사순절도 우리에게 길갈에서 보낸 유월절, 무교절과 같다고 생각합니다. 그리스도의 수난과 죽음에 매이는 것이 아니라, 수난과 죽음을 발판 삼아 더 나은 존재로 부활하는 시간이 되는 것입니다. 실패로 인한 좌절감은 더 나은 사람이 되도록 만들어주는 쇠질과 같습니다. 장인이 두드리는 쇠질을 통해 연장은 단단해지고 형체가 만들어지게 됩니다. 쇠질의 충격을 외면해서는 목적에 맞는 연장으로 빚어지고 거듭날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수난과 죽음이 없이는 부활하신 몸을 입을 수 없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도 고통과 수난을 외면해서는 부활의 옷을 입을 수 없습니다. 당장에는 고통과 상처가 나를 망가지게 하는 것 같지만, 고통과 죽음을 통해 우리는 진정 회복된 존재, 참사람으로 거듭날 수 있게 됩니다. 실패와 고통의 저점은 언젠가 반등이 일어날 수 있다는 기대를 갖게 합니다. 유월절에 쓰디쓴 나물을 먹어야 하듯, 사순절 기간에 우리도 고통의 쓴 맛을 묵상해 봅시다. 고통과 슬픔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시간이 우리를 새 존재로 거듭날 수 있게 한다는 것을 기억하며 사순절을 보냅시다.
사순절은 영양이 풍부하다. (김현승 시인의 시 “밤은 영양이 풍부하다”를 카피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