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배 자료/묵상

시편 73편과 <기생충>

habiru 2019. 7. 19. 08:23

시편 73편

1. (72) [시편. 아삽] 정녕 하느님은 좋으신 분이시다. 올바른 이에게! 하느님은 좋으신 분이시다, 마음이 깨끗한 이들에게!

2. 그러나 나는 하마터면 발이 미끄러지고 걸음을 헛디딜 뻔하였으니 

3. 내가 어리석은 자들을 시새우고 악인들의 평안함을 보았기 때문이네. 

4. 그들에게 아픔이라고는 없으며 그들의 몸은 건강하고 기름졌네.

5. 인간의 괴로움이 그들에게는 없으며 다른 사람들처럼 고통을 당하지도 않네. 

6. 그래서 교만이 그들의 목걸이며 폭행이 옷처럼 그들을 덮었네. 

7. 그들의 눈은 비계로 불거져 나오고 그들의 마음에서는 온갖 환상이 흘러나오네. 

8. 그들은 비웃으며 심술궂게 이야기하고 거만하게 을러대며 이야기하네. 

9. 하늘을 향해 자기네 입을 열어젖히고 그들의 혀는 땅을 휩쓸고 다니네. 

10. 그래서 내 백성이 그들에게 몸을 돌려 저들의 말을 물 마시듯 들이켜네. 

11. 그들은 말하네. “하느님이 어찌 알 리 있으며 지극히 높으신 분이라고 어찌 알아채리오?” 

12. 보라, 바로 이들이 악인들! 언제까지나 걱정 없이 재산을 늘려 가네. 

13. 정녕 나는 헛되이 마음을 깨끗이 보존하고 결백을 내 두 손을 씻었단 말인가? 

14. 날마다 고통이 당하고 아침마다 징벌이나 받으려고? 

 

1.  누군가 악인들을 고발하는 프로그램을 기획하고자 한다면, 아삽을 프로그램의 책임자로 앉히는 것이 좋을 것이다. 아삽의 수사는 악인들이 누리고 있는 건강과 부, 그리고 다른 사람들로부터 받는 존경부터 악인들이 스스로 되뇌는 심리 묘사까지 아우른다. 아삽은 오랜 기간 동안 악인들을 시새우고, 그들이 누리는 평안함을 부러워했다. 그의 관찰은 단기간 이루어진 것이 아니며, 그가 살아온 연수에 이르기까지 이어졌을 것이다. 

2.  얼마 전, 황금종려상의 영예를 얻은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을 관람했다. 영화의 전체적인 장르는 블랙코미디에 가까워 보였는데, 영화를 보고 나서도 끝까지 유쾌할 수 없었던 까닭은 영화가 주는 찜찜함의 여운 때문이었다. 영화 속에선 순수한 선과 악의 구도가 따로 드러나 있지 않아서 더욱 현실적으로 느껴졌다. 그러나 영화의 스토리가 기택(송강호 분)의 가족을 중심으로 흘러가는 데에서 심리적 거리감은 가난한 이들에게 가까울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엔딩(기우의 상상)에서도 뒤바뀌지 않는 기우의 현실은 논픽션 다큐멘터리였다. 결국, 기생충의 반란(혁명)이 맺은 숙주의 죽음이 또다시 기생충의 죽음으로 맺어졌던 것이 못내 씁쓸했다. 공생 관계를 수긍할 수밖에 없는 현실 말이다. 

3. 그러나 아삽의 시편은 수긍할 수밖에 없는 차안의 현실을, 피안의 심판으로 확장시킨다. 나는 여기에서부터 종교가 시작된다고 생각한다. 종교 안에서 기우의 상상력은 확장되고, 상상력이 피안의 심판 안에서 찜찜했던 엔딩의 속 시원함을 가져다준다. 그래서 영화보다 종교에 더욱 큰 상상력이 필요하다. 그렇다고 절대 봉준호 감독과 나아가 영화인들을 포함한 예술세계를 비하하는 것은 아니니 오해는 마시길 빈다. 단지 나는 아삽의 각본이 더욱 마음에 들고 좋을 뿐이다. 내 생각에 조금의 차이점이 있다면 아삽은 악인들의 추악한 내면을 직시하고, 그들의 심리로 곧장 파고들었던 것이다. 그렇다고 나는 아삽이 빈부에 따른 도덕적 흑백론을 지지하는 순진한 자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에게도 중간지대가 있다. 그럼에도 그는 사람의 이면에 있는 교만함과 우월감, 폭력성에서 회피하지 않았다. 그가 직시한 현실은 환상 중에 그 현실이 뒤틀린다는 것이다. 

4. 그래서 나는 아삽의 상상력이 마음에 든다. 환상에는 현실을 뒤틀 만한 힘이 있다. 그리고 다시 환상에서 깬 다음에는, 다시 현실로 돌아와 현실을 바꿀 만한 힘을 준다. 기도가 세상을 바꾼다는 말처럼 말이다. 찜찜함을 넘어가 행동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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