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배 자료/묵상

경건한 말대꾸

habiru 2019. 7. 20. 09:06

시편 74편

1. (73) [마스 킬. 아삽] 하느님, 어찌하여 마냥 버려두십니까? 어찌하여 당신 목장의 양 떼에게 분노를 태우십니까?

2. 기억하소서, 당신께서 애초부터 마련하시어 당신 소유의 지파로 구원하시는 무리를 당신 거처로 삼으신 시온 산은!

3. 당신 발걸음을 들어 옮기소서, 이 영원한 폐허로! 성전에서 원수가 모든 것을 파괴하였습니다. 

 

  나는 어려서부터 어르신의 훈육과 가르침에 대꾸를 하기가 쉽지 않았다. 인간은 교육을 받으면서 무규범의 동물에서 사회적 동물로 진화된다. 많은 이들이 대개 이 과정을 무난히 지나치기도 하나, 한 두 번씩은 사회화에 항거하고 반대하던 경험이 있을 것이다. 나에게도 기억에 남는 일들이 있다. 

  어렸을 때, 나는 자주 교회 주일학교에 늦었다. 주일 아침에는 일찍 나가려고 해도 이상한 일들이 연달아 일이 발생했고, 매번 교회학교의 지각생이 되었다. 집에서 교회까지 긴 거리는 아니었지만, 그때마다 늦을 만한 합당한 이유가 생겼던 것이다. 예를 들어, 오다가 신발끈이 풀렸다든지, 헌금을 집에 두고 와서 다시 집으로 돌아가는 식으로 말이다. 아주 어렸을 때라, 당시에 그 이유들은 내게 온당한 이유로 느껴졌다. 사실, 오래전 기억이라 그런 일들이 잊히기 쉽지만, 내게는 고약한 경험으로 남아 있는 까닭이 있다. 늦을 때마다 주일학교 선생님의 꾸중과 잔소리에 진절머리가 났기 때문이다. 손을 들고 있는 것은 기본이고, 대중 앞에서 나는 꾸지람을 여러 번 들어야만 했다. 나는 합당한 이유로 지각 사유를 설명했으나, 지각생이라는 낙인을 지울 수는 없었다. 그 이유로, 나는 사회적 낙인이 싫어 가능하다면 말대꾸를 하지 않을 상황을 만들기 위해 노력을 했다.

  그러나 생각해 보면, 시편 기자는 하나님께 자주 항변하고 말대꾸를 한다. 하나님께 묻고 따지길 반복한다, 하나님이 말을 하실 때까지. 어디 시편 기자만 그런가. 욥도 그렇고, 하박국도 그러하다. 그러나 어르신의 말에 토를 달지 말라는 유교적 교육은 어릴 적 따지고 항변하길 일삼던 나의 상상력을 고갈시켜버렸다(너무 심한 말인가? 어쩔 수 없다). 나는 ‘착한 아이’로 남고 싶으려는 욕망 때문에, 하나님께도 진솔하기보다는 고상하게 기도하기를 좋아하는 것이 아닐까 싶다. 다시 어린아이와 같이 경건하게 말대꾸하는 기도 방법을 배워야지 싶다. 유진 피터슨은 기도가 ‘친밀함의 언어’가 되어야지, ‘상향의 모독의 언어’가 되지 않아야 한다고 말씀하셨는데, 나는 여태 ‘상향의 모독’이 익숙하니, 서글픈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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