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사 안수

저공비행 중

habiru 2023. 7. 6. 09:42

  선생님께서는 독서하는 이들에게 '저공비행'이 중요하다고 종종 말씀하셨는데, 이는 텍스트의 의도와 흐름, 논지를 넘어서는 독서를 하지 말라는 당부였다. 텍스트라는 지면에 밀착해 비행해야 텍스트의 지형과 지리를 제대로 알아차릴 수 있다는 것이다. 이와 달리 텍스트 저 위에서 '고공비행'을 하다 보면, 텍스트라는 현실과 괴리된 공상을 하게 된다. 선생님께서는 텍스트에 불성실한 ‘고공비행’ 독서를 하지 말라고 몇 번이나 말씀하시고는 하셨다. 베드로의 궤도를 이탈한 질문에 예수님께서 "그것이 너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라고 일갈하셨던 모습처럼 말이다(요 21:21-22). 성서학자 헤르만 궁켈(H. Gunkel)이 사용한 '삶의 정황'(삶의 자리, Sitz im Leben)이라는 말이 있다. 이 용어도 성서가 기록된 구체적인 상황과 배경을 강조하는 개념이라고 할 수 있다.
  비슷한 말은 아니지만, 요새 나는 '저공 비행'과 '삶의 정황'이라는 말을 짝지어 떠올리고는 한다. 둘 다 가현적이지 않은, 실체성과 구체성을 요하는, 실존에 천착해 있다는 느낌이 강하기 때문이다. 지금껏 가치있는 일이라면 이것저것 관여하고자 노력했고, 몇년 동안 사회복지사, 사회적경제 연구활동가, 시민단체 상근활동가로 일하기도 했다. 그러나 내가 살아왔던 ‘삶의 정황’은 그 직무들이 요하는 자리와 무관한 곳이었고, 결국 그 일들을 소명으로 수행하기를 즐길 수 없었다. 그렇게 나는 본연의 소명이 있던 교회로 돌아왔고, 이제 내가 자랐던 교회의 모판 안에서 다시 새로이 목사의 직무를 수행하고자 한다.
  이에 따라 요즘 내가 해야 하는 과업, 시간을 쓰고 관심을 기울이고 있는 일이 무엇인지 고민해 봤다. 심플한 편이었다. 

1. 목사 안수, 교회 개척과 목회 
2. 집안일(특히 밥하고 먹는 일)
3. 강아지 돌봄 


1. 1. 목사 안수와 교회 개척은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레 성취할 수 있는 정량적인 과업에 속한다. 그러나 목회는 다른 성격의 일이다. 시간이 지나더라도 목회는 성취 여부를 가늠할 수 없는 정성적인 판단의 영역에 속한다. 당장 누구를 목회하며, 어떻게 목회하게 될지 예상할 수 없다.

2. 1. 집안일은 끝이 없다. 밥을 먹는 것만 해도 하루 2회 이상이다. 얼추 일 2회*365일*남은 인생 40년씩 계산해도 29,200회를 밥 먹는 일에 써야 한다. 지겨운 일이지만 밥을 먹지 않고서는 살 수 없다.

3. 1. 강아지 돌봄에도 루틴이 있다. 아침 산책, 점심 산책, 오후 산책, 저녁 산책 10분씩 일 4~5회 산책해도 최소 1시간이 소요된다(물론 결과적으로는 늘 그 이상이다). 이외 식사 급여, 패드 정리 및 빨래, 놀아주기 등. 우리 가정에서 강아지 돌봄의 비중이 적지 않다. 강아지의 남은 견생(犬生)을 고려해도 지금부터 10년 이상 비인간 생명체가 우리 가정의 중요한 구성원인 데에는 변함이 없다(몇 달 전부터 아내가 펫시터 사업을 시작한 것은, 동물 돌봄이 가져온 삶의 전환을 반증한다).



  이를 종합하여 지금 내가 정초하고 있는 ‘삶의 자리’가 어떤 곳인지, 어떤 방향성과 운동성이 있는지 정리해 봤다. 물론, 초기 단계의 가능성에 불과하기도 하다.

1. 2. 우리 가정(교회)의 삶에 밀착한 예배를 드린다. 부부(가정)가 거룩한 공교회의 모형임을 몸으로 인지/체현한다.

2. 2. 매주일 성만찬의 식탁을 통해 ‘성찬’의 신학적 의미를 되새김질할 뿐 아니라, 목회적 실천으로서 ‘만찬’이 나눔의 경제로 생환되는 예배를 드린다. 주일 예배에 감사기도(Eucharist)와 성만찬(점심식사), 축복/파송의 순서를 자연스레 녹여낸다.

3. 2. 천국을 선취하는 예배의 모형으로 이사야가 노래하던 모든 동물이 더불어 사는 세상을 기대하며 동물과 함께하는 예배를 드린다(사 11장).

  앞으로 교회 예전 안에 어떻게 이를 녹여낼 수 있을지 기도와 고민 중에 있다. ‘삶의 정황’에 밀착한 저공비행을 통해 내린 나름의 잠정적 결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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