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배 자료/묵상

“내가 누구인지에는 관심이 없는 예수”

habiru 2020. 1. 12. 18:26

새해가 시작된 지도 벌써 보름 가까이 되었다. 아직도 나는 연말연초를 보낼 때마다 2000년을 맞이하던 때가 이따금씩 기억난다. 그건 아마도 세기말의 인상이 뇌리에 지독하게 각인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 시절 기억속의 사람들은 지나치리만큼 산만하고 우왕좌왕하여 금방이라도 무정부주의자들로 돌변할 수 있을 것처럼 보였다. 연신 뉴스에서도 노스트라다무스의 예언을 인용하며, 사회의 혼란을 가중시키는 데에 일조하고는 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누군가 세기말의 혼란과 무질서를 즐기며 조장했던 것이 아니었을까 생각이 든다. 어쨌든 구세계의 종말과 함께 신세계가 개시될 것이라고 믿던 사람들은 대상 없는 두려움 속에서도 일말의 기대감을 갖고는 했다. 눈 깜짝할 새, 현재의 불만족스러운 상황이 만족스러운 상황으로 바뀌진 않을까 했던 것이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0시를 기점으로 불만족스러운 상황이 순식간에 마법처럼 바뀔 리는 없었고, 이후에도 스무 번이나 해가 바뀌는 동안에도 나의 불만족은 조금도 나아지지 않았다. 잠시나마 기대를 갖기엔 세상을 너무 알아버린 것인지 이젠 일종의 기대마저 사라져버렸다. 아마도 불만족에는 다양한 이유들이 있겠지마는, 무엇보다도 정초가 불안하여 흔들리는 존재에 대한 물음이 가장 컸을 것이다. 세상이 어떻게 된들 나 자신이 단단했다면 어떤 요동에도 담담했으리라 의심치 않기 때문이다(자아의 시대착오적 오만함이라고 비난해도 좋다. 내가 가져 보지 못한 정초의 단단함을 탐한다고 한들, 단단함을 경험하지 않고서는 이 욕망을 버리기가 어렵다).
그러나 다행히도 예수께서는 사람들의 배경이나 뿌리 같은 것엔 관심이 없어 보이신다. 아무개가 누구의 아들이며, 아무개의 이름이 무엇인지 그다지 관심을 기울이시지 않기 때문이다. 예수께서는 “요한의 아들 시몬”에 관심이 없다. 그저 예수께서는 자신의 뜻에 따라 “요한의 아들 시몬”을 “베드로”라고 부르신다.

“앞으로는 너를 게바라고 부르겠다.” (‘ 게바 ’는 ‘ 베드로 ’ 곧 ‘바위’라는 말이다.)”
- 요한복음서‬ ‭1:42‬

이전에 네가 누구로 불렸든지 상관없이 앞으로는 “바위”로 불릴 것이다. 그 자신의 정초가 반석처럼 단단한 존재로 불릴 것이다. 결과적으로 예수께서는 “나는 네가 지금 누구인지에는 관심이 없고, 앞으로 되어야 할 사람, 즉 결단력과 용기가 반석과 같은 사람에 관심이 있다고 말한 것이다.” 이런 무관심의 미덕이 있을까.
- 존 쉘비 스퐁의 <요한복음>을 읽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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