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기 싫은 책과 문장

거룩한 독서(lectio divina)

habiru 2018. 4. 5. 15:11

기독교 최대의 거짓말?

성경을 관상할 때 우리가 하는 일은 정보와 교육을 위한 묵상 이상이다. 그런 식의 성경공부도 필요하지만 그것으로 부족하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요한복음 5:39-40에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연구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언하는 것이니라. 그러나 너희가 영생을 얻기 위하여 내게 오기를 원하지 아니하는도다.”

  어떤 관계를 막론하고, 좋은 관계를 이루는 요소에 대해서 공부하는 것과 그런 관계를 실제로 경험하는 것은 천지차이다. 예컨대, 우리는 사랑에 빠지는 것에 대해서 말할 수 있지만, 일단 그런 일이 자신에게 벌어지면 말로는 도저히 그 경험을 표현할 수 없다. 성경을 관상하면, 평범한 공부로는 안되는 친밀하고 신비적인 방식들로 예수님께 올 기회들이 생겨난다. 예수님과의 그런 친밀함을 가꾸지 않고도 정말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다는 것이야말로, 정말 기독교 최대의 거짓말이 아닐까.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토머스 머튼은 이렇게 썼다.


이렇듯, 그리스도인은 단지 일정한 신념 체계에 헌신하고 우주와 인간, 인간의 존재 이유에 관하여 확실한 교리적 개념을 지닌 마음씨 좋은 사람이 아니다. 그는 단지, 개인별로 시행되는 특정한 상벌을 힘써 강조하며 형제애와 자비심의 도덕규범에 따르는 사람이 아니다. 기독교의 바탕은 단순히 하나님에 관한 일련의 교리가 아니다...... 그 반대로, 무한하신 하나님이 그들 안에 있음을 그리스도인들 자신들도 깨닫지 못할  때가 많다. 세상과 인간들 바로 한복판에 계시는 존재, 그 무한하신 근원의 임재를 그들은 모르고 있다. 


머튼에게, 거룩한 독서에서 오는 이런 지혜는 “모든 존재의 무한하신 근원과의 살아 있는 접촉이다. 생각과 마음만의 접촉이 아니라...... 성 바울의 표현대로, 인간과 하나님이 ‘한 영’이 되는, 의식의 초월적 연합이다.”

- 토니 캠폴로/메리 앨버트 달링, <친밀하신 하나님, 행동하시는 하나님>, 221-2. 



  예전에 박대영 목사님의 설교 중에 기억에 남는 이야기 하나가 있다. <매일성경 QT>의 해설서인 <말씀과 묵상>의 편집장을 하시면서도, 본인은 ‘QT’라는 말을 싫어한다는 것이다. 이유인즉슨, QT라는 단어가 소비되는 즉흥적이고 감상적인 뉘앙스를 싫어하기 때문이란다. 

  유진 피터슨이 렉티오 디비나(영적 독서)의 필요성을 말하면서, 삼위일체의 인격성이 ‘나’의 인격성으로 환원되는 독서를 막고자 했던 것과 비슷하다. 오늘날 QT는 성경을 통해 대화하시고자 하는 하나님을 모독하는 경향성이 다분한 것으로 보인다. 이는 신비가들이 거룩한 독서를 통해, 인격(삼위일체)과 인격(나)이 만나 이야기하고 작용하기를 바랐던 것과 다르다. 

  책을 읽으며 기도를 올린다. 말씀을 묵상하면서 하나님과 친밀한 사귐을 갖고, 조금씩 품성의 도야가 일어났으면, 천박한 독서에서 벗어나길 바라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