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배 자료/묵상

아마겟돈(Ἁρμαγεδών)

habiru 2019. 7. 22. 08:10

시편 76편

1. (75) [지휘자에게. 현악기와 더불어. 시편. 아삽. 노래]

2. 하느님께서 유다에 널리 알려지셨네. 이스라엘에 그 이름 위대하시네. 

3. 살렘에 그분의 초막이, 시온에 그분의 거처가 마련되었네. 

4. 거기에서 불화살들을, 방패와 칼과 전쟁 무기를 그분께서 들부수셨네. 셀라

 

  위키백과에는 아마겟돈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아마겟돈(고대 그리스어: Ἁρμαγεδώνˌ, 라틴어: Harmagedon, 히브리어: ארמגדון 하르므깃도)은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세기말  이 싸울 최후의 전쟁터로, 대개의 문화에서 시간의 끝이나 혹은 그와 비슷한 재앙을 나타내는 말이다. 아마겟돈이라는 단어는 히브리어 단어 Har Megiddo (므깃도의 언덕, 히브리어: הר מגידו)에서 왔으며, 고대에 많은 전투가 일어났다고 한다.”

워낙 <아마겟돈>이라는 영화가 유명하기도 했고, 20여 년 전의 사람들은 세기말과 새 천년을 맞는 시기를 겪기도 했기에 희미한 두려움 속에 아마겟돈을 자주 말하고는 했다. 그러나 이제는 세기말의 두려움을 찾아보기 힘들다. 여전히 도처에는 말세의 징조와 같은 소란들이 있으나, 체감상 한국은 상대적으로 평화로운 시기를 잘 지내고 있는 듯하다(물론 애써도 인생의 피로를 외면할 수는 없으리라).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하더라도 몇몇 사람들은 ‘베리칩’, ‘비스트 컴퓨터’를 짐승의 표인 “666”과 연관시켜 음모론을 조장하고 확산시켰다. 내게도 전천년세대주의자들의 성경해석이 만들어 낸 인상이 여전히 뇌리에 강하게 남아 있는데, 그 혼란의 시기를 겪어온 것을 생각하니 허망함이 가득하다. 아마겟돈 음모론은 소위 은밀하고도 신비로운 지식을 알고 있다는 영지주의의 유산인데, 막상 생각해 보면 시편에는 영지주의가 뿌리내릴 만한 토양이 부족하다는 생각이 든다. 왜냐하면 아마겟돈이란 선한 영과 악한 영의 영적 싸움이 아니라 모든 이들에게 계시된 가시적 전투이기 때문이다. 사실상 전투라는 것은 상대의 전력이 비슷할 때 가능한데, 성경은 하나님의 강력한 주권과 권능을 말하기에 실은 전투 자체가 불가능하다. 하나님의 압도적 승리만이 있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아삽은 말세에 일어날 전쟁이 하나님의 주권 아래 있음을 고백한다(시 76편).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주권에 대항하는 자들을 소탕하실 것이며, 이 심판을 목도할 가난한 자들은 하나님을 찬송할 것이라고 한다. 적어도 아삽은 영적 세계의 은밀한 지식이 아니라, 이 세상에서 시작된 싸움에 대해 말한다. 아삽의 신앙은 공상에 의한 것이 아니며 현실과 강하게 연결되어 있다. 그에게 신앙이란 비가시적 실체에 대한 환상이 아니라 철저한 현실주의적 판단에 의한 결론이라는 생각이 든다. 기독교 역사에서 가시적 실체에 대한 엄청난 왜곡이 오랜 시간 일어났다고 생각하니 아리송하다.  

다만, 나는 현실과 동떨어진 신앙의 세계에 거차하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만 가져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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