훈시라 함은, “가르쳐 보이거나 타이름”이라 한다(네이버 국어사전). 그래서 훈시는 윗사람이 아랫사람더러 베푸는 당부와 교훈 등의 의미를 갖고 있다. 어렸을 적에는, 교장 선생님께서 구령대 위에 서서 전교생들을 대상으로 훈시를 하시고는 했다. 대개는 기억이 잘 나지는 않는다. 내 기억엔 따분한 마음을 못 이기고 양발을 번갈아 가며 질질 끌어 모래바람을 일으키고는 했다. 미세먼지의 주범이 되었으리라. 성인이 되어서도 이런 산만함이 이어졌는데, 연병장에 오와 열을 맞추어 서서는 지휘관의 훈시를 듣고는 했을 때다. 그때는 고개를 숙이기도 어렵고, 양발을 질질 끌 수도 없어서, 조금은 더 흐리멍텅한 정신으로 멍을 때리며 훈시를 듣고는 했다. 하지만 여전히 기억에 남는 훈시가 없는 것은, 가슴을 울리거나 뜨겁게 하는 당부가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시편 60편의 표제에는, 다윗이 교훈을 위하여 훈화를 했다고 적혀 있다. 다윗이 북쪽에서 전투를 하고 있을 때, 남쪽에서 에돔의 기습 공격을 받아 진퇴양난에 빠졌던 무렵에 다윗은 이 시를 지었다고 한다. 전선이 갈라지는 것은 그만큼 힘이 분산되어 전세에서 밀릴 가능성이 커지는 것이고, 결국에는 패배에 이르게 되는 것을 뜻한다. 다윗은 북쪽에서 이미 승기를 잡고 있었던 터라, 매우 다급했다. 그래서 남쪽으로 요압을 급파하고 소식을 기다렸다. 그때에 요압이 돌아왔고, 소금 골짜기에서 에돔족 만 이천 명을 물리친 승전보를 전했다. 다윗은 이를 기억하고 후세에 교훈을 남기고자 했다.
다윗은 지휘관으로서 부하들에게 훈화했다. 하지만 그는 개가를 부르지 않고, 고난과 어려움 중에 아룄던 기도에 대해 말한다. 아마 승리는 오래도록 기억되지만, 어려움은 금방 잊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어려움을 잊지 않기 위해 도움의 기도를 기록하는 것이 옳았다고 판단했던 것 같다. 언제나 승리에 비해 패배는 기억되지 못하고 새벽이슬같은 한낱 근심거리로 왜곡되기 쉽다. 힘겨울 때는 전부였던 고난의 세계가 순식간에 사라지는 것이다. 개구리가 올챙이 시절을 기억하지 못하듯, 기쁨의 엑스터시는 고난을 망각시킨다. 그래서 시간이 지나면 승리에 대한 희열이 강한 나머지, 전사자들의 위령과 부상자들의 아픔을 달래는 데에 소홀해진다. 그래서 고통은 단편적이고도 단선적인 사람이 되는 것을 방지하는 방부제와 같다. 고통은 사람을 한층 두텁게 하는 선물이다. 고난은 승리주의의 망령을 방지한다. 다윗은 이를 교훈하고자 했던 것이 아닐까. 들었던 기억 중에 가장 좋은 훈시가 아닐까 생각이 든다.
“하느님, 당신께서 저희를 버리시고 저희를 부수셨습니다. 당신께서 분노를 터뜨리셨습니다. 저희를 회복시켜 주소서. 당신께서 땅을 뒤흔드시어 갈라놓으셨습니다. 그 갈라진 틈들을 메워 주소서. 흔들립니다. 당신 백성에게 고생을 겪게 하시고 저희에게 어지럼 이는 술을 마시게 하셨습니다. 당신을 경외하는 이들에게 깃발을 올리시어 활 앞에서 지레 도망치게 하셨습니다. 셀라 당신의 사랑받는 이들이 구원되도록 당신의 오른팔로 도우시고 저희에게 응답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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