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배 자료/묵상

신: 세상을 보는 창

habiru 2019. 7. 3. 07:56

“오, 신들아, 너희가 진실로 정의를 말하며 올바르게 사람들을 심판하느냐?

너희는 오히려 마음속으로 불의를 지어내고 너희 손의 폭력을 땅 위에 퍼뜨리는구나.” (시편 58편)

  

  시대를 주도하고 있는 어떤 영적인 에너지가 있다는 것이 느껴질 때가 있다. 한 세대 전에는 개인의 정치적, 경제적 자유를 최고의 기치로 삼는 범 자유주의와 정치적, 경제적 평등을 우선순위로 두는 사회주의, 공산주의가 이에 해당할 것이다. 지금도 우리나라에서는 자유와 평등의 이념이 서로 각을 세우고 이념적 투쟁을 부추기고 있다. 남녀와 노소가 서로 나뉘어 진영에 따라 서로 날을 세우고 있다.

  그러나 진일보한 에너지가 되어 사람들의 영혼을 지배하고 통제하는 것이 있다. 이는 자본주의다. 자본의 자가증식에 시대의 현인들도 자본의 영을 초월해 있기가 쉽지 않다. 신체적 에너지(스포츠)와 성적 유희(섹스)의 영역도 자본의 증식 앞에 고유의 설 자리를 잃고, 각각 스포츠 산업, 섹스 산업이라는 형용사적 지위로 전락하게 되었다. 그래서 시대를 이끄는 이 자본의 에너지를 무인격체로 대하기가 더 어려워 보인다. 그래서 사람들이 지적하는 것처럼 자본주의의 에너지는 생동감 있는 인격으로 지칭하는 더욱 좋아 보인다. 

  현대인들과 마찬가지로 고대인들도 이 신성한 에너지를 “신”으로 칭했다. 예를 들어, 고대근동에서는 “신”들의 이름이 ‘바알’, ‘아세라’ 등으로 붙여졌다. 그들은 번영과 장수, 풍요를 상징한 인격체로 받아들여졌다. 그들은 사람들의 존경과 제사가 없이는 생명을 유지할 수 없었다. 그러나 사람들로부터 의존해 있는 신들의 이름과 달리, 오직 “야훼”만은 “스스로 있는 자”로 불렸다. 이는 세대를 구성하는 사람들의 필요와 기대와 무관하며 독립된 신을 의미한다. 오직 “야훼”는 사람들로부터 기대어 있지 않은 존재, 홀로 계신 분으로 계시된다. 그래서 시편은 “다른 신”들의 존재를 부정하지 않으면서도, “스스로 계셨던 야훼”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게 된 것이 아닐까. 대개 사람들은 잇속에 따라 움직이기에 진실과 정의가 아니라, 불의와 폭력에 쉽게 유혹된다. 그래서 한낱 시대정신이란 것도, 사람들이 “신”으로 추앙하는 것도 불의와 폭력을 투영하기 마련이다. 그리고 그것에 물들어 있기 마련이다. 하지만 몇몇 성인들과 그들과 함께하는 공동체는 신들의 실체를 폭로하고, 진실을 발견했다. 우리는. 이 세상의 풍조에 휩쓸리지 않고, 자리를 잡을 수 있을까. 그것이 숙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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