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때에 그가 내게 말씀하셨다. "사람아, 너는 생기에게 대언하여라. 생기에게 대언하여 이렇게 일러라. '나 주 하나님이 너에게 말한다. 너 생기야, 사방에서부터 불어와서 이 살해당한 사람들에게 불어서 그들이 살아나게 하여라.'"
1. 들어가는 말
이제 곧 4월입니다. 따스한 햇볕이 드는 곳엔, 싱그러운 꽃들이 여기저기에 보입니다. 제가 사는 제주에는 유채꽃이 피었고, 개나리와 목련도 보입니다. 노란 산수유도 보이고, 벚꽃인지 매화인지 헷갈리지만 두 나무에도 꽃이 피었습니다. 지난 겨울은 유달리 쓸쓸하게 느껴졌습니다. 흐린 날이 많기도 해서 세상이 무채색으로 보였습니다. 하지만 봄을 맞이하는 3월이 되니 점점 채색이 짙어져 보기에 좋습니다. 유달리 3월엔 맑은 날이 많아 파란 하늘도 보기에 좋았습니다. 멈춰 있던 세상에 생기가 돌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맘때쯤 우리나라 사람들은 계절의 순환, 겨울과 봄의 교차를 통해 죽음과 생명이 교차하는 것을 직감적으로 배웁니다. 새싹이 돋아나고, 아지랑이가 피어나는 봄에 생명력을 느낍니다. 공원의 잔디가 누런 색에서 초록 색으로 바뀌는 것을 보며 생명의 힘을 느낄 수 있습니다. 누가 뭐라 하지 않아도, 3~4월에 죽음의 사순절과 생명의 부활절을 몸소 체험학습할 수 있으니 하나님의 은혜라고 할 수 있습니다.
2. 1. 에스겔서의 배경
우리가 함께 읽었던 에스겔서는 남유다 왕국의 쇠퇴를 시대적 배경으로 삼고 있습니다. 솔로몬이 다스렸던 왕국은, 솔로몬 사후에 북이스라엘과 남유다로 나뉩니다. 분열된 두 나라는 서로 원만한 관계를 유지할 때도 있었지만, 서로 갈등하고 다툴 때도 있었습니다. 그렇게 두 나라가 갈라진 이후에 250여 년 정도 시간이 흘러 북이스라엘이 멸망했습니다. 이후 남유다는 150여 년 정도 뒤에 멸망합니다.
에스겔은 남유다가 국력을 잃고 쇠퇴하던 때에 살았습니다. 그는 예레미야와 비슷한 때에 활동했으나, 예레미야와 달리 포로로 잡혀 온 사람들과 함께 바빌로니아에서 선지자로 활동했습니다. “내가 포로로 잡혀 온 사람들과 함께 그발 강 가에 있었다(겔 1:1, 새번역).” “주님께서 바빌로니아 땅의 그발 강 가에서 (…) 나 에스겔 제사장에게 특별히 말씀하셨으며, 거기에서 주님의 권능이 나를 사로잡았다(겔 1:3, 새번역).”
전쟁의 포로로 끌려오기 전후로 많은 사람들이 죽었을 테고, 사람들은 참혹한 세상 속에서 전쟁의 피해자, 난민이 되었습니다. 에스겔은 포로가 되어 외국으로 강제 이주할 수밖에 없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제사장으로 자신이 생활하던 터전인 예루살렘 성전마저 파괴된 뉴스를 듣고 절망에 빠졌을 것입니다. 고통스러운 현실 속에 그의 실존적 고민이 깊어졌을 것입니다. 어디에서부터 잘못된 것인지, 시련과 고통의 원인은 무엇인지, 고통스러운 상황이 나아질 것인지, 질문과 같은 자책감에 시달렸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겔 4:4; 6, 새번역]
4 너는 또 왼쪽으로 누워서, 이스라엘 족속의 죄악을 네 몸에 지고 있거라. 옆으로 누워 있는 날 수만큼, 너는 그들의 죄악을 떠맡아라.
6 (…) 네가 다시 오른쪽으로 누워서, 유다 족속의 죄악을 사십 일 동안 떠맡고 있거라. (…)
에스겔은 고통스러운 현실이 하나님의 심판과 징벌임을 받아들였습니다. 에스겔이 받아들인 고통의 연유에 대해 누군가 동의하든, 동의하지 않든 그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에스겔을 따라 교회는 남유다가 처한 고통스러운 상황이 하나님의 심판과 징벌이라는 것을 받아들이지만, 세속 역사가들은 남유다 정치가들의 부패와 타락, 외교적/정치적 문제로 해석하기도 합니다. 마찬가지로 여전히 이어지고 있는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전쟁, 난민 문제에 대해 이런저런 해석들이 많습니다. 누군가는 종교적인 해석을 할 테고, 누군가는 정치 문제로 볼 것입니다. 뭐라고 하든 지금은 그것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겠습니다. 다만 지옥 같은 현실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고통에 대해 생각해 봅시다.
우리 주변에도 삶의 무게에 지친 사람들이 많습니다. 고통스러우면 눈물 흘릴 수도 있을 텐데, 울지도 못하고 끙끙 싸매는 이들도 있습니다. 굴곡진 인생을 지나고 있는 사람들에게 고통의 이유를 묻는 것은 사치입니다. 이야기를 들으며 떠들고 싶은 말이 생각나지만, 때론 고통의 이유를 묻지 않고 기다리는 것이 최선일 때가 있습니다. 대신에 어떻게 고통에서 그들이 구원받을 수 있을지 기도하고 위로해야 할 때가 있습니다. 그것은 에스겔에 해당하는 것만은 아닙니다. 지금 말씀을 함께 보고 있는 나, 그리고 나의 가족, 나의 친구 모두에게 해당하는 말입니다. 에스겔 37:9의 전후 맥락은 다음과 같습니다.
2. 2. 본문 해석
[겔 37:1-14, 새번역]
1 주님께서 권능으로 나를 사로잡으셨다. 주님의 영이 나를 데리고 나가서, 골짜기의 한가운데 나를 내려 놓으셨다. 그런데 그 곳에는 뼈들이 가득히 있었다.
2 그가 나를 데리고 그 뼈들이 널려 있는 사방으로 다니게 하셨다. 그 골짜기의 바닥에 뼈가 대단히 많았다. 보니, 그것들은 아주 말라 있었다.
3 그가 내게 물으셨다. "사람아, 이 뼈들이 살아날 수 있겠느냐?" 내가 대답하였다. "주 하나님, 주님께서는 아십니다."
4 그가 내게 말씀하셨다. "너는 이 뼈들에게 대언하여라. 너는 그것들에게 전하여라. '너희 마른 뼈들아, 너희는 나 주의 말을 들어라.
5 나 주 하나님이 이 뼈들에게 말한다. 내가 너희 속에 생기를 불어넣어, 너희가 다시 살아나게 하겠다.
6 내가 너희에게 힘줄이 뻗치게 하고, 또 너희에게 살을 입히고, 또 너희를 살갗으로 덮고, 너희 속에 생기를 불어넣어, 너희가 다시 살아나게 하겠다. 그 때에야 비로소 너희는, 내가 주인 줄 알게 될 것이다.'"
7 그래서 나는 명을 받은 대로 대언하였다. 내가 대언을 할 때에 무슨 소리가 났다. 보니, 그것은 뼈들이 서로 이어지는 요란한 소리였다.
8 내가 바라보고 있으니, 그 뼈들 위에 힘줄이 뻗치고, 살이 오르고, 살 위로 살갗이 덮였다. 그러나 그들 속에 생기가 없었다.
9 그 때에 그가 내게 말씀하셨다. "사람아, 너는 생기에게 대언하여라. 생기에게 대언하여 이렇게 일러라. '나 주 하나님이 너에게 말한다. 너 생기야, 사방에서부터 불어와서 이 살해당한 사람들에게 불어서 그들이 살아나게 하여라.'"
10 그래서 내가 명을 받은 대로 대언하였더니, 생기가 그들 속으로 들어갔고, 그래서 그들이 곧 살아나 제 발로 일어나서 서는데, 엄청나게 큰 군대였다.
11 그 때에 그가 내게 말씀하셨다. "사람아, 이 뼈들이 바로 이스라엘 온 족속이다. 그들이 말하기를 '우리의 뼈가 말랐고, 우리의 희망도 사라졌으니, 우리는 망했다' 한다.
12 그러므로 너는 대언하여 그들에게 전하여라. '나 주 하나님이 말한다. 내 백성아, 내가 너희 무덤을 열고, 무덤 속에서 너희를 이끌어 내고, 너희를 이스라엘 땅으로 들어가게 하겠다.
13 내 백성아, 내가 너희의 무덤을 열고 그 무덤 속에서 너희를 이끌어 낼 그 때에야 비로소 너희는, 내가 주인 줄 알 것이다.
14 내가 내 영을 너희 속에 두어서 너희가 살 수 있게 하고, 너희를 너희의 땅에 데려다가 놓겠으니, 그 때에야 비로소 너희는, 나 주가 말하고 그대로 이룬 줄을 알 것이다. 나 주의 말이다.'
하나님께서는 에스겔을 골짜기 한가운데로 끌고 가셨습니다. 골짜기에는 뼈들이 가득했습니다. 인생 골짜기 한가운데에서 고통에 지쳐 살아있지만 죽어있는 것 같은 사람들이 많습니다. 자신이 누구인지, 무엇을 해야 하는지, 생기조차 느껴지지지 않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때론 나 자신도 그렇습니다. 살아있지만 죽은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이렇게 살다간 죽을 것만 같은데, 도대체 탈출할 방법이 없습니다. 삶의 무게가 억눌려 숨부터 막힐 때가 있습니다. 진로와 직업, 가족과 육아, 사람, 돈 때문에, 지긋지긋한 굴레에서 벗어나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사방이 막힌 듯하고, 무거운 공기에 숨이 막힐 때도 있습니다. 답도 없는 현실에 차라리 내가 없어지면 좋겠다, 생각이 들 때도 있습니다. 얼른 천국에서 어떤 걱정도 없이, 고통도 없이 사랑하는 사람들과 행복하고 편안하게 살고 싶다는 생각을 하기도 합니다.
“우리의 뼈가 말랐고, 우리의 희망도 사라졌으니, 우리는 망했다(겔 37:11, 새번역).”
여러분, 이 뼈들이 살아날 수 있겠습니까? 엄두가 안 나니까, 에스겔도 “주님께서는 아십니다.”라는 말로 대답을 회피하는 것같습니다(겔 37:5). “제가 볼 때는 가망이 없는 것 같습니다.”라는 말을 괄호 생략한 것처럼 느껴집니다. 그럼에도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대신 전합니다. “너희 마른 뼈들아, 너희는 나 주의 말을 들어라. 나 주 하나님이 이 뼈들에게 말한다. 내가 너희 속에 생기를 불어넣어, 너희가 다시 살아나게 하겠다(겔 37:4-5).”
대언자로서 에스겔은 하나님의 말씀을 대신 전달합니다. 왜 하나님께서는 직접 말씀하지 않고, 어떤 이유로 에스겔은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말했을까요. 주석에서 본 것이 아닌 개인적인 생각입니다만, 루아흐(ruach)라는 히브리어 단어에 담긴 중의적 의미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대신 말하는 사람으로서 에스겔의 소명은 말에 있습니다. 기본적으로 말과 호흡은 유기적입니다. 호흡을 하지 않고 말할 수 없습니다. 호흡을 하며 숨을 뱉어내 공기의 파동을 만들어내야 말이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대언자 에스겔의 말과 호흡을 통해 메마른 뼈들에게 호흡(ruach)이 불어넣어지길 원하셨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에스겔의 인공호흡을 통해 메마른 뼈들에게 생기(ruach)가 불어넣어집니다. 본문에서 “생기”라고 번역된 단어 루아흐(ruach)에는 “호흡”이라는 뜻도 있습니다. 즉, 대언자의 입에서 나오는 말의 호흡을 통해 하나님의 말씀이 메마른 뼈들에게 생기를 불러일으킨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대언자와 함께 메마른 뼈에 생명을 불어넣으시는 것입니다.
에스겔과 같이 여러분도 대언자가 되어 메마른 뼈들에게 생기를 전달하는 인공호흡을 해 주십시오. 하나님의 말씀은 대언자가 필요합니다. 그래서 에스겔은 그 말을 대신 전하는 대언자로 부름 받습니다. 너는 이 뼈들에게 대언하여라(4절), 나는 명을 받은 대로 대언하였다(7절). 너는 생기에게 대언하여라, 대언하여 일러라(9절). 명을 받은 대로 대언하였다(10절). 너는 대언하여 전하여라(12절).
그 말을 들은 널브러진 뼈들 위에 힘줄과 근육이 생기고, 살이 생기며, 그 위로 살갗이 덮였습니다(겔 37:8). 피골이 상접해 말랐던 뼈들에게 한 소망이 일었습니다. 그들이 비로소 시체 아닌 사람으로 살 가능성을 갖추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의 꼴만 갖춘 것과 사람은 다릅니다. “살해당한 사람들”에겐 생기가 필요합니다(9절). 그들은 스스로 죽은 것이 아니라, 외부의 힘에 의해 죽임 당한 사람들입니다. 외부의 요소로 타살당한 것입니다. 삶의 고통의 무게에 숨만 겨우 쉬다가 억눌려 죽어버린 사람, 사회적으로 살해당한 사람입니다. 골짜기 한가운데에서 어떤 희망도 없이 망가져 버린 사람들입니다. 그런 그들에게 우리는 대언자로서 위로해 줄 수 있습니다. 혹은 지금 고통 중에 있는 여기 있는 누군가를 위해 제가 하나님의 말씀을 대신 전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고통의 사순을 보내며 우린 부활을 기다립니다.
“내가 너희 무덤을 열고, 무덤 속에서 너희를 이끌어 내겠다(겔 37:12)”.
3. 결론
최근에 드라마를 한 편 보았습니다. 영혼없이 살아가는 어른, 어른아이의 이야기였습니다. 누구나 선망하는 권력과 부, 그런 것들을 가진 사람의 이야기가 아니었습니다. 한때 직장에서 인정받고 잘 나갔던 사람들은 이른 나이에 직장에서 밀려났고 퇴직 (당)했습니다. 누구보다 열심히 살았지만, 살아가고 있을 따름입니다. 드라마 속 인상 깊은 내용이 있었습니다.
겸덕: 넌 어떻게 지내는데?
동훈: 망했어, 이번 생은. 어떻게 살아야 될지 모르겠다.
겸덕: 생각보다 일찍 무너졌다. 난 너 한 60은 돼야 무너질 줄 알았는데. (…) ‘이 세상에서 잘 살아봤자 박동훈 저놈이다. 더럽게 성실하게 사는데 저놈이 이 세상에서 모범답안일 텐데 막판에 인생 더럽게 억울하겠다.’
동훈: 그냥, 나 하나 희생하면 인생 그런대로 흘러가겠다 싶었는데.
겸덕: 희생 같은 소리하고 있네. 네가 6.25 용사냐, 인마? 희생하게. 열심히 산 것 같은데 이뤄놓은 건 없고, 행복하지도 않고, 희생했다 치고 싶겠지. 아이, 그렇게 포장하고 싶겠지. 지석이한테 말해 봐라. 널 위해 희생했다고. 욕 나오지. 기분 더럽지. 누가 희생을 원해. 어떤 자식이 어떤 부모가 아니, 누가 누구한테? 거지 같은 인생들의 자기 합리화. 쩐다, 인마.
동훈: 다들 그렇게 살아.
겸덕: 아유, 그럼 지석이도 그렇게 살라 그래. 그 소리에 눈에 불나지? 지석이한텐 절대 강요하지 않을 인생, 너한테는 왜 강요해? 너부터 행복해라, 제발. 희생이란 단어는 집어치우고.
<나의 아저씨> 11화 중.
생각해 봅시다. “마른 뼈”는 징벌을 받는 이스라엘 민족만이 아닙니다. 반짝이던 총기가 사라진 채 아등바등 살아가는 내 친구, 타인으로부터 인정받는 삶과 사회적 성공을 위해 흡혈귀에 물린 듯 피폐해진 내 친구, 우리 주위에 “마른 뼈”가 널렸습니다. 인생 골짜기 한가운데를 지나고 있는 누군가, 나 자신도 “마른 뼈”일 수 있습니다.
생기로운 성령님께 우리 자신과 우리의 가족, 친구를 위한 기도를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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