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때부터 예수께서는 "회개하여라.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하고 선포하기 시작하셨다. (마태복음 4:17, 새번역)
(도입)
지난해, 제주에서 뵙고 1달이 지나 다시 뵙게 되어 반갑습니다. 지난 제주 여행이 시작하는 날부터 마치는 날까지 즐거운 추억으로 기억되었으면 합니다. 함께하지 못한 교우도 있지만, 다음 기회에 또 즐거운 시간을 보낼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교회에서는 그리스도인의 영성 생활을 돕고자 1년이라는 시간 동안 예수님의 생애를 시간 순서대로 만든 달력을 사용하고는 했습니다. 그 달력을 교회력이라고 합니다. 이를 따라 12월에 예수님의 탄생을 기다리고 축하하는 대림절과 성탄절을 보내고는 합니다. 그리고 그 이후에는 예수님의 수침 이후에 공생애 사역을 시작하신 날을 기리고, 예수님의 고난과 십자가 구속 사역을 기다리는 사순절을 지킵니다. 이후 부활절과 성령강림절이 이어집니다. 교회력이란 예수님의 생애를 좇아가며, 우리도 예수님의 발자취를 따르고자 하는 영성을 훈련하는 도구로 볼 수 있습니다.
오늘 여러분과 나누고자 하는 본문은, 교회력에 따라 예수님의 수침 사건입니다. 예수님께서 요단 강에서 침례를 받으실 때, 하나님의 아들로서 예수님의 신분을 증언하는 소리가 하늘에서 났다고 합니다.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이다, 내가 그를 좋아한다(마 3:17). 따라서 우리는 침례를 받으신 이후,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로서 이 땅에서 이루시고자 했던 것이 무엇인지 비로소 명징하게 알 수 있습니다.
(문제 제기)
여러분은 나 자신이 어떤 사람이라고 생각하시나요? 아니, 여러분은 어떤 사람이고, 어떤 꿈을 소망하시나요? 여러분의 꿈은 무엇인가요? (…) 여러분처럼 제게도 꿈이 있습니다. 어렸을 때부터 꿈꾸며 바랐던 삶이 있습니다. 처음엔 대학을 졸업하면 그 꿈을 이룰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30대 중반이 된 지금까지도 꿈만 꾸고 있으니 언제쯤 그 꿈을 이룰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요즘 들어서는 마흔이 되어서도 여전히 꿈을 이루지 못하고 꿈만 좇고 있지는 않을까 봐 노파심이 들기도 합니다.
그러나 사실 더 걱정되는 것은, 꿈만 꾸는 것이 아니라 꿈을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정신없이 살아가다 보면 현실에 치여서 어느새 꿈과 희망까지도 잃어버릴까 봐 걱정이 듭니다. 지금도 여기저기 신경 써야 할 곳이 많은데, 40~50대의 중년이 되면 신경 써야 할 곳이 더욱 많이 생긴다고 합니다. (40대이신 분들, 정말로 그런가요?) 그래서 서점에 가면 “마흔에 읽는 00”, “오십에 읽는 00” 등의 제목을 가진 책들이 많이 보입니다.
일과 과업에 치여 어떻게 시간이 흐르는지 모르고 하루를 보낼 때가 많습니다. 그렇게 하루, 이틀이 지나 일주일이 금방 지나갈 때도 많습니다. 그래서 지난 1년을 되돌아보면 시간을 허망하게 보낸 것은 아닌지 후회가 되기도 합니다. 그 일을 더 열심히 했더라면, 늦기 전에 무엇을 했더라면 하는 생각에 괴롭기도 합니다. 하지만 과거에 대한 후회와 달리, 여전히 오늘도 주말만 기다리며 사는 모습이 역설적으로 느껴집니다.
그래서 어떤 이는 용기를 내서 여행을 떠나라고 합니다. 현실에 치여 꿈도 잊고, 희망도 잃고 사는 이들에게 여행을 떠나라고 권합니다. 철학자 니체는 30대 중반에 교수직을 그만두고 여행을 떠났다고 합니다. 그는 자기 자신을 찾기 위해 유럽 곳곳을 여행하면서 사유했다고 합니다. 그는 자신의 삶을 변화시키고 싶을 때, 남을 위한 여행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위한 여행을 떠나라고 합니다. 그것은 고독하고 쓸쓸한 여행일 수 있습니다. 진정 내가 바랐던 삶이 무엇인가, 진정 내가 꿈꾸던 삶은 무엇인지 찾아가는 여행입니다. 여행이란 안정적인 환경을 떠나 불안정한 환경에 처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런 불안정하고 혼란스러운 상황이 자기 자신을 찾는 데에 도움이 될 때가 있습니다. 고독한 시간 속에서 내면의 소리를 들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면에서 여행은 일상적인 일과에서 벗어나 자기 내면을 직면하게 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겠습니다. 즉, 관습적인 사고와 루틴에서 벗어나 나 자신을 돌보는 것과 관계됩니다. 그래서 수많은 교부와 영성가가 도시를 떠나 사막과 광야에 거했던 것이 아닐까 합니다.
(본문 해석)
침례를 받으시기 전, 예수님께서 어떤 삶을 사셨는지 우리는 잘 모릅니다. 그래서 다양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혹자는 아버지의 직업을 따라 목수로 사셨다는 이야기가 있고, 또 어떤 사람은 외국으로 유학을 가서 종교를 연구했다고도 합니다. 예수께서 누구신지, 그의 생각과 바람, 인생관, 가치관, 어느 하나 아는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의 공적 생애, 공생애 사역이 수침 이후에 시작된 것은 분명합니다. 즉, 요셉의 아들이 아닌 하나님의 아들로서 자신의 삶을 살게 된 청년 예수를 이제서야 제대로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침례를 받으신 예수님 위에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성령이 비둘기와 같이 내렸다고 합니다(마 3:16). 성령은 왜 비둘기로 비유되었을까요. 비둘기는 새로운 세상을 상징하는 동물입니다. 노아가 살았던 시대, 하나님께서 세상을 심판하신 후의 방주에서 보낸 비둘기가 물고 돌아온 올리브 나뭇가지는 새로운 세상에 대한 징조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침례를 받으신 이후, 성령은 비둘기처럼 내렸습니다. 요단 강물 위에 강림한 비둘기와 같은 성령은 새로운 나라, 하나님 나라의 전조와 같습니다.
수침을 받으신 예수님께서는 성령에 이끌려 광야로 가셨습니다. 광야는 살기에 척박한 곳입니다. 극단적으로 춥고 더운 곳입니다. 성령께서는 안정적인 생활과 거리가 먼 곳으로 예수님을 이끄셨습니다. 광야에서는 생존을 위한 의식주, 사회생활, 어느 것 하나 안정된 것이 없습니다. 이제 막 사역을 시작하려는 예수님께 광야는 피해야 하는 곳입니다. 성공적인 사역이 목적이라면 예수님은 광야로 나가선 안 됩니다. 곧장 예루살렘으로 나가 성전 한복판에서 하나님 나라를 전파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생각과 달리, 성령과 예수님께서는 광야로 떠나셨습니다. 출애굽 이스라엘은 제사장 나라와 제사장 백성이 되기 위해 광야에서 40년을 살았습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께서는 하나님 나라를 위해 광야에서 40일 동안 시험을 받으셔야 했던 것입니다.
광야 시험을 마치신 후, 갑작스러운 비보가 이어집니다. 침례자 요한이 감옥에 갇히게 된 것입니다. 광야 시험이 일종의 신고식, 관문이었다고 하더라도 이제는 본격적으로 동지와 함께해야 할 때입니다. 엘리야의 예언대로 예수님의 사역을 위한 전령으로 활약했던 이가 요한입니다. 공생애 사역을 시작하신 예수님께 침례자 요한은 당신과 함께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동역자, 동지였습니다. 그런 그가 옥에 갇히게 된 상황은 좋지 않은 상황입니다.
주목할 만한 점은, 요한이 선지자 엘리야를 롤모델로 삼아 사역했던 것입니다. 엘리야의 용모는 털이 많았고, 허리에 가죽 띠를 두르고 있었는데(왕하 1:8), 낙타털 옷을 입고 가죽 띠를 매고 있는 요한의 모습은 엘리야를 연상시킵니다. 엘리야가 이스라엘이 아닌 사르밧 지역의 이방인을 위해 사역했듯이, 요한도 잘난 척하는 이스라엘의 사두개인과 바리새인을 위해 사역하지 않았습니다. 도리어 그는 땅바닥의 돌멩이라도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다고 했습니다. 당시 돌멩이는 이방인을 비하하는 용어로 볼 수 있는데, 즉 이방인을 향해 요한이 열린 마음을 가졌던 것으로 이해됩니다.
어찌 되었든 침례자 요한은 예수님의 사역에 힘을 보탤 수 있는 동역자였습니다. 그런 그가 옥에 갇힌 것입니다. 그때, 예수님께서는 이방인이 많이 거주했다고 하는 갈릴리 지역으로 이동합니다. 흑암의 그늘에 앉은 백성, 이방의 갈릴리라는 호칭은 아무래도 예수님의 사역이 혼란 속에 시작한 것을 보여줍니다(마 4:14-16). 광야 생활, 옥에 갇힌 침례자 요한의 소식, 갈릴리 변방에서 시작된 예수님의 사역, 어느 것 하나 좋은 상황이 없습니다. 그럼에도 그 때부터 예수님께서는 ‘회개하여라.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 선포하기 시작하셨습니다(마 4:17). 모든 것이 불확실하고 불안정한 타이밍에 청년 예수의 꿈과 비전이 드러나기 시작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꿈꾸신 세상은 어느 것 하나 준비되지 않은 중에 선포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꿈꾸신 세상은 혼돈과 혼란의 세상 속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청년 예수는 예루살렘 성전 입구에서 기자회견을 하신 것이 아닙니다. 현실 감각이 뛰어난 정치인이라면 상징적인 장소에서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출마를 선언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지지자들의 열렬한 환호와 기대를 의지하고 하나님 나라의 꿈과 이상을 선포한 것이 아닙니다. 사두개인과 바리새인의 후원을 받아 사역이 시작되었다면 예수님의 사역이 수월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바라고 꿈꾸신 세상은 그렇게 시작되지 않았습니다. 혼란과 혼돈 속에서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의 꿈을 꾸셨습니다.
(적용)
저는 혼란과 혼돈, 무질서를 늘 정돈되어야 하는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허무하고 허망한 공허를 부정하며, 무의미한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어쩌면 혼란과 혼돈, 무질서한 시간과 장소가 새로운 창조를 위한 준비물일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혼란과 혼돈, 무질서함은 개선되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 혼란과 혼돈, 무질서가 있기 때문에 새로운 세상이 시작될 틈새가 생기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혼란과 혼돈은 새로운 세상을 위한 준비물, 재료입니다. 혼란과 혼돈은 새로운 창조를 위한 가능태입니다. 얼마든지 새로운 창조를 위해 쓰일 수 있는 재료입니다. 그렇게 공허함에 의미가 부여되고 허무함이 정복당하는 것입니다.
창세기 2장에서는 “주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그의 코에 생명의 기운을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명체가 되었다”라고 합니다(창 2:7). 손에 잡히지 않고 바스러지는 흙을 통해 사람이 만들어집니다. 흙, 먼지라는 뜻의 히브리어 אֲדָמָ֔ה(아다마)가 사람이라는 뜻의 אָדָ֗ם(아담)이 됩니다. 아무런 의미 없이 공허한 흙먼지는 창조의 재료가 됩니다. 그렇게 흙먼지에 의미가 부여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아담과 아다마처럼 한 끗 차이입니다.
혼란스러운 시간, 여러분도 그런 시기를 지나고 계시지는 않습니까? 만약 그렇다면 그 시간이 여러분이 여러분 자신을 찾아가는 데에 반드시 필요한 시간이라고 생각하시길 바랍니다. 그렇게 의미를 부여하여 공허함을 정복하십시오. 여태 아무것도 이룬 것 없이 허망하다고 느껴진다면, 이 또한 여러분 자신이 만들어지고 빚어지는 데에 필요한 과정, 시간이라고 생각하십시오. 고통스럽고 고독하며, 외로운 시간을 지난다고 생각하더라도 여러분 자신이 바라는 일을 하는 데에 필요한 인내의 시간이라고 믿으십시오. 그렇게 남이 바라는 모습이 아닌, 내가 진정 원하는 모습이 되는 데에 필요한 시간이라고 여기십시오. 예수님처럼 무의미한 세상에 의미를 부여하는 창조자가 되십시오. 새 세상을 일구는 일꾼이 되십시오.
반대로 지나치게 안정적인 곳에 있다고 느껴지는 분이 계시다면, 일주일 중 하루는 일상과 거리두길 권합니다. 광야로 여행을 떠날 수는 없지만, 세상에 대한 만족은 여러분 자신과 꿈을 잃어버리게 할지도 모릅니다. 혼란과 혼돈의 시간을 기꺼이 받아들이고, 그것을 회피하지 마십시오. 그런 시간이 없다면 여러분은 어느새 여러분 자신을 잃어버리게 될지도 모릅니다. 새로운 세상을 일구는 사람이 아닌, 옛 세상을 공고히 하는 사람이 되지 마십시오.
예수님께서 꿈꾸신 나라는 변방의 아웃사이더를 통해 만들어지는 나라였습니다. 그래서 정치 지도자, 종교 지도자를 제자로 부르시지 않고, 평범한 어부를 제자로 부르셨습니다. 그 점에서 여러분과 저도 제자로 부름 받기에 합당합니다. 그러나 제자가 되기까지 용기가 필요합니다. 예수님의 제자가 되기 위해서는 나를 지지해 주는 환경을 떠나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를 통해 하나님 나라, 새로운 세상이 창조된다는 것을 잊지 않으시길 바랍니다. 여러분이 정녕 믿고 따를 만한 분이 누구신지 기억하며, 용기 내는 성도가 되길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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