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배 자료/설교

그들의 눈이 열려서

habiru 2023. 4. 22. 01:11
[누가복음 24:30-32, 새번역]
30. 그리고 그들과 함께 음식을 잡수시려고 앉으셨을 때에, 예수께서 빵을 들어서 축복하시고, 떼어서 그들에게 주셨다.
31. 그제서야 그들의 눈이 열려서, 예수를 알아보았다. 그러나 한순간에 예수께서는 그들에게서 사라지셨다.
32. 그들은 서로 말하였다. "길에서 그분이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성경을 풀이하여 주실 때에, 우리의 마음이 [우리 속에서] 뜨거워지지 않았습니까?"


1. 들어가는 말
  지난 한 주간 평안하셨습니까? 일요일 아침, 고단하지 않으신가요? 지난 한 주간 생업과 집안일, 공부, 여러가지 일을 하다 보면 일요일 아침엔 늦잠도 주무시고 싶으실 텐데 괜찮으신가요? 아침 일찍 일어나 예배를 드린다는 것이 힘드실 텐데 고생하셨습니다.  
  오늘은 일요일, 주일에 관한 이야기를 해 보려고 합니다. 어려서부터 모태신앙인이었던 저는 주일 성수를 빠졌던적이 없었는데, 군입대를 하고 처음으로 주일에 예배를 못 드린 적이 있습니다. 자대 배치를 받고 외딴 검문소에 몇 개월 동안 파견 생활을 한 적이 있는데, 물리적으로 일요일에 교회당을 갈 수 없는 환경이었습니다. 그래서 많이 당황스럽기도 하고 힘들었던 기억이 납니다. 주일성수 때문이기도 했지만, 그때는 새로운 생활에 적응하기가 힘들어 하소연하고 기댈 곳을 찾고 싶었던 마음이 더욱 컸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몇 주를 지내고 보니 일요일에 예배를 드린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궁금했습니다. 정말 특별한 의미가 있기는 한 것일까요? 대개 처음 신앙생활을 시작한 분들이 안식일과 주일의 차이에 대해 묻기도 합니다. 그럼 친절하게 설명해 주시는 분들이 있는가 하면, “예배드리기 싫어?”라고 되물으며 “쓸 데 없는 소리하지 말고 예배나 드려.”라고 엄포를 놓는 분도 있습니다. 유대인들에게 안식일은 금요일 저녁부터 토요일 저녁까지의 하루입니다. 그런데 대개 많은 기독교인들은 일요일 0시부터 24시까지를 주일이라고 하여 예배를 드리고 있으니 분명히 다른 날이긴 합니다.
  주일에 예배드리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간단히 말해, 우리가 주일에 예배를 드리는 까닭은 안식일 첫날 아침에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셨기 때문입니다. 교회가 예수님께서 부활하셔서 죄와 죽음의 권세를 이기고 승리하셨다고 고백하기 시작하면서 일요일(안식일 후 다음날)은 중요해졌습니다. 그래서 일요일은 “주의 날”로 불리게 되었습니다. 주일(The Lord’s Day)을 야웨 하나님께서 세상을 심판하실 것이라고 했던 선지자들의 예언이 성취된 날로 믿게 된 것입니다. 초기 그리스도인들이 주일 아침에 모여 식사를 하고 예배를 드리며, 한 주를 시작함으로써 안식일이 점차 주일로 대체되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매 주일은 부활을 축하하는 ‘작은 부활절’로 불리기도 합니다. 특별히 부활절 이후, 성령 강림절이 있기 전까지 몇 주간의 주일은 부활을 축하하는 기간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오늘은 부활에 대한 말씀을 나누고자 합니다. 함께 보실 말씀은 누가복음 24장의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의 이야기입니다.

2. 본론
사실 이 말씀은 누가복음 24:13부터 시작하는 이야기입니다. 누가복음 24장은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셨던 예수님께서 다시 살아나셨다는 이야기부터 시작합니다. 본장 초반부의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던 여성 제자들이 예수님께서 부활하셨음을 알려주는 천사를 만났다는 증언을 합니다. 베드로도 빈 무덤만 보고 돌아옵니다. 상당히 어수선한 상황입니다. 황망한 예수님의 장례 소식에 이어 망자가 살아났다는 소식에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도 당황스러운 상황입니다.
   두 사람은 이를 기이하게 여기며 예루살렘에서 엠마오라는 마을로 가고 있는 중이었습니다. 그러던 중,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나타나셨습니다. 시치미를 떼듯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무슨 일로 이야기를 하는지 물으셨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따르던 사람들이었지만, 부활하신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16절). 예수님의 질문에 그들은 침통한 표정을 지으며 멈춰섰습니다(17절). 그러고는 어떻게 그 소식을 모른다는 말이오, 하며 예수님을 쏘아붙입니다. 그렇게 “그분”에 대한 이야기가 이어집니다.  
  두 사람은 우리와 같은 문제를 안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부활의 여부와 상관없이 인생의 문제 앞에 침통해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부활도 부활이지만, 그들은 예수님께 소망을 걸었던 사람입니다. 그랬기 때문에 예수님의 황망한 죽음 자체가 문제였습니다(21절). 그들의 문제는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와도 같습니다. 비트코인, 주식, 부동산에 투자했는데 허망한 결과를 얻었다고 생각해 봅시다. 엠마오의 두 사람도 예수님이라는 상품에 투자했는데 파산한 것과 다름없습니다.
  우리에게도 문제가 있습니다. 단단하게 꼬여 절대로 풀리지 않는것처럼 보이는 직업과 진로, 연애, 육아, 하나하나가 모두 문제입니다. 거지 같은 인생, 죽어라 욕해도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습니다. 기도를 한다고 해서 나아지지도 않습니다. 아무리 설교를 듣고, 예배를 드려도 해결되지 않는 문제가 있습니다. 제가 만났던 사람들이 말하길, 아내에겐 남편이 짊어져야 할 십자가요, 남편에겐 아내가 골고다 언덕이라고 합니다. 사랑해서 결혼했는데, 결혼해 보니 서로가 서로를 인생 최대의 난제로 여깁니다. 그래서 자녀에게 기대를 하자니 자식 새끼도 말썽입니다. “이것만 고치면 난 저 사람이랑 싸울 일 없어요.”라고 하는데, 평생 “이것” 못 고친다는 게 정설과 같습니다.  
  두 제자의 이야기를 듣자 예수님께서는 “어리석은 사람들입니다. 예언자들이 말한 모든 것을 믿는 마음이 그렇게도 무디니 말입니다.”라고 그들을 책망하시며, 성경의 이야기를 풀어 주셨습니다. 두 제자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돌아가시기까지 예수님을 따르던 사람들이었지만, 실은 예수님이 누구신지 몰랐습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한 건 우연이 아닙니다(16절). 문제로 씨름하던 두 사람은 예수님의 설명과 가르침을 처음 들었던 것일까요? 생전에 예수님께서는 비유와 설교로 자신의 고난을 말씀하셨습니다만, 그들은 알아듣지 못했습니다.
  친히 예수님께서 성경 이야기를 풀이해 주셨지만, 여전히 그들은 예수님이 누구신지 알지 못했습니다. 예루살렘에서 엠마오가 약 11km 정도 된다고 합니다. 성인 걸음으로 3~4시간이면 걸을 수 있는 거리니까 최소 1~2시간 정도 대화를 하지 않았을까 합니다. 마을 가까이 이르러 저녁 때가 되고 날이 저물자 그들은 예수님을 집으로 모시고자 합니다. 한낮에도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했는데, 날이 저물고 저녁이 되니 예수님을 알아볼 가망이 더욱 없습니다. 성경 이야기의 작가를 모시고 즉문즉설 일대일 담화를 나누었는데, 그분이 누구신지 못 알아 봤으니 더는 할 말이 없습니다. 그들이 갖고 있던 문제는 해결되지 않았습니다. 일생일대의 가르침도 그들에게는 무용지물이었습니다. 아무리 훌륭한 가르침을 듣고, 자기계발을 해도 해결되지 않는 인생 문제가 있습니다. 계산해 보니 1년이 약 52주이므로 매주 1편의 설교만 들었다고 해도 10년이면 520편의 설교를 듣고, 20년이면 1,040편의 설교를 듣습니다. 들어서 귀가 트이는 건 있습니다. 대충 설교 본문을 들으면, 무슨 말씀 하시겠네, 생각이 듭니다. 하지만 정작 해결해야 할 문제는 그대로일 때가 많습니다. 아무리 성경 말씀을 읽고 훌륭한 설교자의 설교를 들어도 인생이 펴지지 않는 건 똑같습니다. 메시지가 문제입니까? 아니면 메신저가 문제입니까? 아니면 우리의 믿음이 없기 때문입니까? (…)

  (1) 음식을 들고 축복하시다(영성의 통로)
  이제 이야기는 정점으로 치닫습니다. 이야기의 하이라이트는 예수님께서 그들의 집에서 그들과 함께 음식을 잡수시려고 할 때 일어납니다. “그들과 함께 음식을 잡수시려고 앉으셨을 때에, 예수께서 빵을 들어서 축복하시고, 떼어서 그들에게 주셨다(30절).”
  음식(빵)은 우리의 생활 양식을 의미합니다. 음식은 물질적인 것이지만, 음식에는 공동의 생활 양식이 담겨 있습니다. 어떻게 보면 음식에는 영성(spirituality)이 담겨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유대교에는 코셔(kosher) 음식법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돼지고기는 유대인에게 금기시되는 음식입니다. 이러한 이유에 대해선 여러 설이 있지만, 가축으로서 돼지는 소나 양, 닭에 비해 비생산적이라고 합니다. 다른 가축에 비해 돼지는 사람의 손이 많이 가고, 사람과 돼지의 먹는 것이 겹쳐 식량을 두고 경쟁을 할 수 있다고 합니다. 부자는 얼마든지 맛있는 돼지고기를 먹을 수 있지만, 사람이 먹어야 할 곡물을 돼지에게 줌으로써 가난한 사람은 음식을 부족하게 먹을 수밖에 없습니다. 사회적으로 볼 때, 돼지를 사육하는 비용에 비해 돼지고기로 얻는 이익이 크지 않다는 것입니다. 돼지고기를 금하는 음식법에는 ‘네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가르침이 반영되어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즉, 음식을 들고 기도하시는 행위는 예수님의 영성이 세상 안에 드러나는 통로가 됩니다. 유대의 음식법을 생각해 보며, 주님께서 빵을 들고 기도하시는 모습을 상상해 봅시다. 당신의 뜻이 물질계에 드러나는 매개체가 됩니다. 탐욕을 절제하고, 이웃을 돌보라는 정신이 음식 안에 나타납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먹고 마시는 음식, 별 볼일 없이 보이는 행동들도 우리의 영성을 드러내는 표지가 되기도 합니다. 영성과 일상의 양태는 무관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식탁이 필요 이상의 음식량과 육류만으로 가득찬 식탁이라면, 우리는 탐욕(Gula)스러운 영성가일지 모릅니다. 다만, 한두 번 그런 것이 아니라 습관으로 굳어지는 것을 말씀드리는 것이니 오해하지 않으셨으면 합니다. 내가 주로 구사하는 말의 내용, 이웃을 대하는 태도, 거주하는 공간, 관심을 쓰고 시간을 보내는 일 자체가 내가 누구인지 보여주는 영성의 통로가 됩니다.

  (2) 떼어서 그들에게 주시다(사랑의 영성)
   기도를 마치신 후, 예수님께서는 엠마오의 두 제자들에게 빵을 떼어서 주셨습니다. 주님께서 돌아가시기 전, 제자들에게 빵을 들어 나눠주셨던 것을 기억나게 합니다. “예수께서는 또 빵을 들어서 감사를 드리신 다음에, 떼어서 그들에게 주시고 말씀하셨다. "이것은 너희를 위하여 주는 내 몸이다.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억하여라(눅 22:19, 새번역)."
  주님께서는 당신의 삶을 우리를 위해 내어주셨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당신을 기억하라고 말씀”만” 하시지 않으셨습니다.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행동하셨습니다. 그렇게 우리는 주님의 빵을 받습니다. “그제서야 그들의 눈이 열려서, 예수를 알아보았”습니다(31절). 신령한 말씀을 들었을 때, 예수님을 알아본 것이 아닙니다. 식탁 앞에 앉아 빵을 나눠주시는 “그분”을 볼 때, 누구신지 깨닫습니다. 빵을 나누시는 행위를 통해 말씀을 깨닫습니다. "길에서 그분이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성경을 풀이하여 주실 때에, 우리의 마음이 [우리 속에서] 뜨거워지지 않았습니까(32절)?"
  해가 저문 시간이란, 어둠의 시간입니다. 그러나 어둠은 빛을 이기지 못합니다. 어둠을 이기고 주님의 빛이 제자들에게 비추었기 때문에 그들은 주님을 보게 되었습니다. 톰 라이트는 창세기와 누가복음을 비교합니다. 창세기에서는 선악과를 먹은 아담과 하와 “두 사람의 눈이 밝아져서, 자기들이 벗은 몸인 것을 알”았습니다(창 3:7, 새번역). 그러나 예수님께서 사망의 권세를 이기시고 부활하신 이후, 두 사람의 눈은 부활하신 예수님의 새로운 몸을 보게 됩니다. 이제 각기 다른 두 사람은 자신들의 벗은 몸이 아닌, 예수님의 새로운 몸을 봄으로써 역사가 새로운 전환기를 맞이한다는 것을 상징하는 역할을 합니다.

3. 나가는 말
  엠마오의 두 제자가 겪은 문제는 식탁 앞에서 해결되었습니다. 그들의 문제는 신령한 말씀으로 해결되지 않았고, 음식을 나누는 식탁교제 안에서 해결되었습니다. 식탁 앞에서 그들은 말씀을 깨달았고, 그들이 씨름하던 문제의 본질을 깨달았습니다. 초월적인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가 먹고 마시는 가운데에서 비로소 의미가 밝히 드러납니다. 주님의 말씀, 그리스도인의 영성은 일상을 통해 구현됩니다. 물론 우리 자신이 제일순위로 두고 있는 가르침 자체가 세속적인 것이라면 문제가 될 것입니다. 세속 말씀의 세례를 받고 있다면, 세속적 삶의 양태로 우리는 살아갈 것입니다. “끝없이 소비하라, 그러면 인정 받을 것이니.” 그렇게 세속 말씀에 은혜를 받고 충만해진 사람은 탐욕적 소비자가 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소비 행태는 자유하게 하시는 그리스도교의 영성과는 무관한 영성일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빵을 나누시는 행위 속에서 당신을 우리에게 내어주시는 사랑을 보여주셨습니다. 빵과 포도주를 나눠 주시며 우리에게 자신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라는 주님의 삶은 우리가 행해야 할 의식(행위)입니다. 주님께서 보이신 사랑의 영성은 사랑의 영성, 나눔의 영성입니다. 주님의 식탁은 우리를 초청하신 하늘나라의 잔치이며, 영원한 생명을 누리기까지 우리가 기억하고 행해야 할 모범입니다. 우리도 그 행동을 따르고 모방할 수 있습니다. 이를 통해 우리가 누구인지 증명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의 삶은 그리스도께서 보이신 사랑의 영성이 드러나는 통로입니다. 우리를 세상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보이신 사랑의 시그널을 구현하는 교회로 불러주셨고, 우리는 응답하고자 합니다. 어쩔 때는 대단한 영성가가 된 것처럼 으스대고 우쭐할 때도 있습니다만, 때로는 우리의 삶이 골조없는 건물처럼 무너져 버리고, 마른 건초더미처럼  불타 사라진 것처럼 느껴질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 우리를 긍휼히 여기시고 우리의 푯대와 방향을 조정해 주십시오. 함께 기도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