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전통에서(따라서 “공교회성”, 즉 보편성을 띤다) 역사적 기독교 예배는 하나님이 그분의 은혜로 만물을 자신과 화복하게 하신 사건(골 1:20)을 중심으로 한 기본 줄거리나 서사 구조를 반영한다. 많은 이들이 역사적 기독교 예배는 회중을 네 장으로 이뤄진 이야기로 초대한다고 지적했다.
모임 > 들음 > 사귐 > 보냄
수 세기에 걸쳐 전해 내려온 기독교 예배의 서사 구조는 하나님과 창조세계의 관계를 거시적으로 재연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각 단계에서는 추가되는 요소가 있다. 예를 들어, 여는 “장”에 해당하는 모임은 예배로의 부름으로 시작된다. 이는 하나님이 은혜 가운데 먼저 우리에게 찾아오셨음을 상기시키고, 창조주가 우리를 부르셔서 우리가 존재하게 되었음을 떠올리게 한다. 연주가 시작되고 교인들이 천천히 걸어 들어와 무리와 합류하면서 모호하게 시작되는 예배와 달리, 예배로의 부름으로 시작되는 예배에서는 예배 가운데서 일하시며 우리가 그곳에 있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먼저 듣는다. (이런 기독교 예배 구조 자체가 이미 대항문화적이라는 점에 주목하라. 이런 예배 구조는 자기중심성과, 세상을 우리가 원하는 방식으로 만들려는 욕망을 버리게 한다.) 따라서 예배로의 부름은 우리 삶에서 창조주의 으뜸되심과 주권을 매주 재연하는 행위다. 우리는 창조하시는 하나님에 의해 인간 존재로 부르심을 받았듯이, 성령의 능력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구속하신 바로 그 하나님에 의해 새로운 삶으로 부르심을 받았다. 하나님의 창조력이 우리를 인간으로 존재하게 하셨듯이, 새롭게 하시는 성령의 능력이 우리를 참 인간으로 살아가게 해 줄 것이다.
하나님의 거룩한 임재로 들어오도록 부르심을 받고 그분의 은혜로 환영을 받은 우리는 그분의 거룩하심과 우리의 죄인 됨을 깨닫고 죄를 고백하는 시간을 갖는다. 우리는 이 공동체적 실천을 통해 우리의 무질서한 욕망으로, 또한 불의한 체제 안에서 공모자가 됨으로써 하지 말아야 할 바를 행한 죄와 해야 할 바를 행하지 않은 죄를 직시한다. 매주 죄를 고백하라는 요청을 받는 것은 복음 이야기의 핵심 장을 기억하라는 뜻이다. 기독교 예배로 모인 수많은 모임에서 이 장을 없애면 우리는 무엇을 잃어버리게 될까? 자기 신뢰라는 세속 예전에 저항하는 복음의 중요한 측면, 대항 형성적 측면을 놓치게 된다. 일주일 내내 세속 예정는 “자기 자신을 믿으라”라고 암묵적으로 가르친다. 이것은 은총을 거부하는 자기 확신의 거짓 복음일 뿐이다. 죄의 고백이라는 실천은 우리의 사랑을 재형성하기 위한 핵심 훈련이다.
하지만 죄의 고백이라는 그리스도인의 실천은 “벌레 신학(worm theology)”이라는 비참한 곤경과는 다르다. 죄를 고백할 때마다 곧바로 용서와 사죄라는 복된 소식의 선포가 이어지기 때문에 이것은 일종의 영적 피학증에 불과하다. 용서라는 복된 소식 자체가, 참 평화가 아니라 재화와 용역만 제공하는 소비주의 복음의 무력함과 절망에 맞서는 대항문화적(따라서 대항 형성적) 실천이다.
이제 역사적 기독교 예배가 “서사적 논리”가 있는 줄거리를 중심으로 구조화되어 있음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거룩하지만 용서하시는 하나님의 임재로 은혜롭게 부르심을 받은 후에는 이제 들음의 장으로 들어간다. 여기에는 하나님의 율법, 즉 우리 삶을 향한 그분의 뜻이 선포되는 것을 듣는 행위가 포함된다. 이 율법은 우리가 구원을 획득하기 위해 “지키려고” 애쓰는 괴로운 멍에가 아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오직 그분 때문에) 용서를 받았음을 이미 알고 있다. 오히려 우리는 율법을 선물로, 즉 하나님이 우리에게 유익하며 우리를 번영으로 이끄는 삶의 방식으로 은혜롭게 인도하시는 방편으로 받아들인다. 율법이 선포될 때 하나님은 우리를 “우주의 결대로” 살아가는 삶으로 초대하신다.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는 것을 들을 때, 우리는 성경 이야기를 우리 이야기로 만들고 우리 자신을 구속 드라마의 등장인물로 바라볼 수 있는 기회를 다시 한 번 얻는다.
이는 우리가 하나님과 다른 사람들과 나누는 사귐에서 절정에 이른다. 우리는 우주의 창조주와 만찬을 나누도록, 왕과 함꼐 식사를 하도록 초대를 받는다. 하지만 우리 모두가 초대를 받기에 그들과도 화해해야 한다. 그리스도와의 사귐이 우리가 그분의 몸으로서 나누는 사귐 가운데로 흘러넘친다. 이는 사회적 실체, 심지어 정치적 실체의 재연이다. 이 식탁에는 특별석도, VIP를 위한 예약석도 없다. 여유 있는 사람들만 안심 스테이크를 즐기고 나머지는 식탁에서 나온 부스러기만 먹는 일도 없다. 주의 만찬은 불평등이 심해지는 세상에서 평등을 이루는 현실, "만민을 위하여 기름진 것과 오래 저장하였던 포도주"를 베푸는 연회(사 25:6)라는 이상을 재연하는 행위다. 이 이상한 잔치는 또 다른 도시 곧 천상 도성의 공민적 의례이기 때문에 충성 맹세, 즉 신앙고백이 포함되어 있다. 이 사귐을 통해 우리 마음은 하나님의 삼위일체적 삶의 중심으로 이끌려 들어간다. 따라서 이 예전의 핵심은 '수르숨 코르다(sursum coda)’, 즉 "마음을 드높이 는 것이다. 예배에서 우리는 "주님께 마음을 들어 올린다." 주의 만찬은 단지 과거에 이미 성취된 바를 기억하는 행위가 아니라, 우리 마음에 영양을 공급하는 잔치다. 우리의 가장 근원적이며 가장 인간적인 굶주림을 재교육하는 실존적인 식사다.
삼위일체 하나님의 삶으로 초대를 받은-그리스도 안에서 재창조되고 그분의 말씀으로 지혜를 얻고 생명의 떡으로 영양을 공급받은-다음에는 하나님의 선한 창조세계를 가꾸고 돌보며 모든 백성을 제자로 삼도록 세상으로 보내진다. 예배의 마지막 장인 보냄은 하나님의 형상을 지닌 인간이 본래 받은 사명을 다시 한 번 확인하는 행위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와 기독교 예배라는 실천-안에서 우리는 마침내 하나님이 창조하실 때 의도하신 인간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살아 숨 쉬는 하나님의 "형상”으로서, 하나님의 창조세계라는 성전에서 살도록 보냄을 받는다. 우리는 창조세계를 가꾸고 다른 이들도 이 이야기에서 자신의 인간성을 찾도록 이끌라는 사명을 수행함으로써 그분의 형상을 지닌 존재로 살아갈 수 있다. 따라서 예배는 축복이자 가라는 명령을 담은 축도로 마무리된다. 하지만 이 명령은 우리를 절대 떠나지도 버리지도 않으실 성자의 임재 가운데, 그 임재와 더불어 가라-평안히 가서 주를 사랑하고 섬기라-는 명령이다.
이것은 역사적 기독교 예배의 "줄거리"를 대단히 간략하게 묘사한 내용에 불과하다. 이 책 마지막의 참고 문헌에는 예배의 줄거리를 더 자세히 설명해 주는 자료를 수록했다. 하지만 어떤 의미에서 이 줄거리를 요약해 주는 책을 읽는 것과 당신이 직접 이 실천에 몰입하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다. 고양이 꼬리를 붙잡고 옮기는 일처럼 직접 해 보지 않으면 절대로 이해할 수 없는 것이다. 모든 분석이나 설명의 목적은 이 실천에 담긴 의미를 이해하도록 돕고, 우리가 예배할 때 무엇을 왜 하는지를 이해하도록 돕기 위해서다. 그렇지 않다면 의레는 '전통적"-혹은 더 나쁘게는, 미신적이며 판에 박힌-행동으로만 보일 것이다. 하지만 이 실천에 내재된 성경 이야기를 이해하고 나면, 예배가 어떻게, 왜 제자도의 핵심인지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예배는 변화시키시는 하나님의 은총의 성례전적 핵심이다. 예배는 우리 에로스의 나침반을 수리하는 시설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혹은 칼뱅이 주장했듯이, 교회의 예배는 성령이 우리로 하여금 우리 마음을 회복시키시고 우리를 새로운 이야기 안으로 이끄시는 영적 운동을 단계적으로 하게 만드시는 체육관으로 생각해 볼 수도 있다. 솔직히 말해서, 아침에 일어나서 운동하러 가기 싫은 날도 있다. 침대가 너무 안락하고 밖은 너무 추워서 그냥 가만히 있고 싶다. 하지만 하나님의 백성은 거기에 없고, 성령의 성례전도 그곳에 없다. 그리고 당신이 원하지 않는다고 “느낄" 때조차도 주의 만찬이라는 식사는 필요하다. 말씀이라는 양분이 필요하다. 당신이 어떤 사람이 되고 싶어 하는지 당신은 알고 있으며, 이 이야기에 몰입할 때 성령이 당신의 습관을 바꿔 놓으실 것을 알고 있다.
- 제임스 K. A. 스미스, <습관이 영성이다 You Are What You Love>, 152-7. 박세혁 역, 비아토르, 2018.
'잊기 싫은 책과 문장' 카테고리의 다른 글
루미나리스 (0) | 2023.04.27 |
---|---|
습관이 영성이다(You Are What You Love) (0) | 2023.04.22 |
누가 사람이냐 (0) | 2022.08.19 |
햇살에게 (0) | 2021.02.17 |
성육신을 도모하는 존재로서의 인간: <참사람> 3부를 읽으며 (0) | 2020.09.2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