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

소소한 신변잡기: “팖과 삼(삶)”

habiru 2020. 2. 29. 15:18

비가 내리던 2월 마지막 화요일 저녁이었다. 겨울비라고 하기엔 늦고, 봄비라고 하기엔 다소 이른 날의 비가 내리고 있었다. 그날은 하루 종일 비가 내렸는데, 빗방울이 바닥에 부딪히는 까닭에 나던 소리의 조화와 리듬이 매우 듣기 좋은 날이었다. 적당한 명암을 띠고 있던 하늘은 충분히 사람들을 차분하게 만들었고, 빗물에서 나는 적당한 비린내는 사람의 체취와 섞여 낯선 이에 대한 경계심을 풀리게 하여 몸을 편안한 상태로 만들고 있었다.

퇴근하던 길의 나는 문득 장을 보고 싶어졌고, 자동차의 핸들을 오른편으로 꺾어 마트를 향해 엑셀을 밟았다. 즉흥적이었던 나의 결정은 무언가 결핍되어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기보다는, 막연히 사람을 만나고 싶다는 생각에 그랬던 것일지도 모른다. 고작 사람을 만나고 싶어 찾아간 곳이 마트라니, 사람을 만날 곳이 생각나지 않았다. 요새는 전염병이 유행하는 까닭에 사람의 온전한 얼굴을 보기 힘들고, 얼굴의 절반까지만 볼 수가 있다. 얼굴이라 함은, 사람의 얼이 담긴 골짜기라던데 요새는 그 굴곡을 제대로 볼 수 없다. 그 까닭에 얼(정신)과 마음을 나누는 벗이 그렇게 그리웠던 것인지 알 수 없다. 그렇게 사람에 대한 결핍을 채우기 위해 나는 사람들이 있는 마트로 향했다. 마트 옆 네거리에는 비를 맞으며 노란색의 점퍼를 입은 어느 야당의 후보가 피켓을 들고 서 있었다. 내심 그를 응원하고 있던 터였지만, 상황이 상황이니만큼 그에게 다가가 “힘내시라” 말하기는 포기했다. 대신 가벼운 눈인사와 함께 그를 지나쳤다.

그날 마트는 평일 저녁이라고 하기엔 유난히도 사람들이 많아 보였다. 아무리 역병이 유행이라지만 사람들은 “팖”을 그치지 않았고, 또 다른 사람들은 삶을 위한 “삼”을 지속하고 있었다. “인간은 무엇으로 사는가”라던 톨스토이의 질문에, 인간은 “팖과 삼(삶)”으로 산다고 대답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어디서든 사람들은 “팖과 삼”으로 살고 있다. 사람은 홀로 있는 실존이 아니라 서로 주고받는 복수의 실존으로 살아가고 있다는 말이, 아쉽게도 이 문화에서는 “팖과 삼”으로 환원되는 것이다. 톨스토이는 이웃을 향한 환대의 정으로 산다고 하지 않았던가, 문득 인간 살이가 “팖과 삼”으로 대체되는 것처럼 느껴져 서글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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