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기 싫은 책과 문장

목회자의 소명

habiru 2017. 7. 12. 15:00

  나는 그 예술가들과 윌리 오싸와 함께 2년간 그 금요일 저녁 시간들을 보냈다. 모든 사람이 자신에게 주어진 직무설명서에 따라 사는 것 같아 보이는 사회에서 자신의 소명을 지키며 사는 사람들과 그렇게 가까이 지낸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내가 보기에 예술가들은 자신의 소명이 주는 정체성에 대해서 그다지 의식하지 않는 것 같았다. 나는 그들이 '성공적' 예술가가 되는 것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을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다. 그들의 소명은 다른 사람들이 그들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는지, 혹은 그들이 돈을 얼마나 버는지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었다. 물론 그들은 브로드웨이에서 연기하고 춤추고 노래하고 싶어 했다. 그리고 분명 윌리는 자신의 그림을 매디슨 애비뉴에 있는 갤러리에 전시하고 싶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의 정체성은 소명에 따른 것이지, 직무설명서에 따른 것이 아니었다. 

  내가 목사가 된 것은 그로부터 5년이 더 지나서였지만, 일단 목사가 되었을 때 나는 그것이 소명이지 직업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나는 동료 목사회의 친구들에게 윌리와 뉴욕의 예술가들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우리 모두가 그와 비슷한 경험을 가지고 있었다. 우리는 소명과 직업의 차이를 분별하는 관찰력을 키웠다. 사방에서 목사들이 자신의 소명을 저버리고 직업을 택하는 것을 보면서 우리는 스스로를 위해서 그 구분을 분명히 해야겠다고 결심했다. 직업은 계량화될 수 있고 평가될 수 있다. 어떤 일이 완수되었는지 안 되었는지를 결정하는 것은 쉽다. 어떤 일이 잘 되었는지 잘못되었는지를 알아보는 것도 비교적 쉽다. 

  그러나 소명은 그런 식의 직업이 아니다. 직장에 고용되어 주어진 일을 하면 적당한 임금을 받을 것이고, 하지 않으면 해고당할. 것이다. 그러나 나는 목사로 고용이 될 수 없다. 왜냐하면 목사의 일차적 책임은 내가 섬기는 사람에 대한 것이 아니라 내가 섬기는 하나님에 대한 것이기 때문이다. 사실 내가 섬기는 사람들은 예수님을 통해서 계시된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보다는 자신들이 원하는 일을 해주는 우상을 종종 선호한다. 현재 우리 문화에서 직업과 소명 사이의 분명한 선은 상당히 흐려져 있다. 목사로서 나는 어떻게 해야 내 일을 돈을 받고 하는 직업으로, 내 교단이 맡긴 직업으로, 회중이 만족할 만한 일을 하는 직업으로 인식하지 않을 수 있을까? 어떻게 해야 내가 이러한 삶의 방식을 시작하게 만든 부름에 계속 주의를 기울이고 귀기울일 수 있을까? 그 부름은 미국이라는 환경에서 교회를 매력적이고 유용한 곳으로 만들라는 부름이 아니라, 사람들이 자신에 대해서 좋은 느낌을 가지고 잘 살도록 도우라는 부름이 아니라, 나의 여러 재능을 사용해서 나 자신을 만족시키라는 부름이 아니라, 아브라함이 받은 부름처럼 '자신이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떠나는' 부름이고, 나 자신을 부인하고 내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르라는 부름이고, 요나의 부름처럼 자신이 싫어하는 도시인 '니느웨로 당장 가라'는 부름이고, 바울의 부름처럼 '일어나 성으로 들어가면 거기에서 네가 할 일을 알리라'는 부름이다. 

  세속 사회건 교회건, 이 문화 전체가 내게 직무설명서를 주는 현실에서 어떻게 해야 내 귀에 대고 직접 부르시는 하나님의 음성에 즉각 반응하고 그 권위를 인정할 수 있을까? 어떻게 해야 목사의 소명이, 화려한 도전과 비전과 전략으로 치장하고 계속해서 내 주의를 끌려고 아우성치는 직무설명서에 잠식되지 않게 할 수 있을까?

- 유진 피터슨, <유진 피터슨>, 26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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