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렌다가 온 다음 날 채리티가 새벽 5시에 브렌다의 방으로 오더니 침대로 기어 올라가 할머니 품에 안기면서 말했다. "할머니가 계시는 동안에는 우리 '하나님 애기(godtalk)' 하지 말아요, 네? 하나님은 어디에나 계시다고 나는 믿어요. 그러니까 우리 그냥 살아요."
브렌다가 그 이야기를 들려주었을 때 나는 채리티가 무언가 중요한 것을 포착했구나 생각했다. 그것은 황무지에서 목사의 소명을 단련시켜 주는 불 가운데 있던 내가 깨닫기 시작한 것과 일치하는 말이었다. '하나님 얘기'라는 말이 결정적이었다. 채리티가 하고자 했던 말은 그리스도인들이 사는 나라는 삶 전체라는 것이었다. 시편에서는 그것을 '산 자의 땅'이라고 종종 표현한다. 채리티의 말이 의미하는 또 한 가지는 우리의 말과 글과 가르침과 기도로부터 삶이 빠져나가 버리면, 특히 하나님, 예수님, 기도, 믿음과 같은 말들을 대상화시켜 버리는 불임의 생명력 없는 언어를 사용한다면, '하나님 얘기'밖에는 남지 않게 된다는 것이었다.
새벽 5시에 외할머니를 반긴 채리티의 행동은, 우리의 일상생활과는 단절된 거룩하신 하나님에 대해서만 말하는 언어, 관념이나 충고나 규칙으로 축소되는 언어, 아무런 이야기가 없는 하나님 얘기로 전락한 언어를 사용하는 삶에 대한 정확하고도 정직한 반응이라고 나는 해석했다. 채리티는 먼저 왔다 가신 친할머니가 말하는 방식에서 무언가 본질적인 것이 빠졌다고 느꼈고 그것을 이번에 오신 외할머니가 만회해 주시길 기대했던 것이다. 채리티는 삶이 그리웠다. "그러니까 우리 그냥 살아요."
채리티는 하나님이 하나님 얘기로 비인격화되지 않고 자신들의 일상생활에, 말에서나 행동에서나 하나님과 삶이 유기적으로 하나가 되는 그러한 일상생활에, 인격적으로 현존하시는 분으로 이해되는 관계를 외할머니에게 부탁하고 있었다. 채리티는 모든 것이 아직은 직접적이고, 개인적이고, 관계적인, 자의식이 없고 스스럼없는 유년기에 살고 있었다. 머지 않아 그러한 관계적인 연결성과 개인적인 직접정성은 관념으로 추상화되고, 역할을 따르는 행위로 축소되고, 존재 대신에 기능으로 축소될 것이다.
- 유진 피터슨, <유진 피터슨>, 380-1.
유진 피터슨의 이야기에는 깊은 울림이 있다. 채리티의 얘기를 담담히 전하는 그의 언어에 영혼이 느껴진다. 아마도 영성이란 그런 것이 아닌가 싶다. 언어, 혹은 비언어적인 것으로도 풍성하게 그 사람의 전인격이 전달된다. 이 사람과 깊이 있는 사귐의 관계에 있는 것 같다.
나는 살아내는 신학을 하고 싶다. 생활 언어 가운데에 하나님의 현존이 느껴지고, 삶 전체에서 하나님의 이야기가 진하게 우러나오는 사람이 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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