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기 싫은 책과 문장

쉐키나 이야기

habiru 2017. 7. 11. 13:23

  폴이 말했다. "유진, 이 이야기를 알아 두는 게 좋을 거야. 오래된 랍비 이야기야. 쉐키나는 집단적 비전을 일컫는 히브리어인데, 그 집단적 비전을 통해 흩어져 잇던 신성의 파편들이 한데 모이지. 보통은 빛을 퍼뜨리는 현존으로 이해해. 말하자면 어떤 시간과 장소에서 하나님을 인식하게 하는 빛이지. 하나님은 보통 어떤 장소에 계시진 않지만 말이야. 그건 대대적으로 드러나는 광경이라기보다는, 격려하거나 확인해 주기 위해서 혹은 우리가 아직은 볼 눈이 없는 어떤 것의 실재를 드러내기 위해서 하나님이 자신의 재량으로 선택해서 보여 주시는 것에 더 가까워. 성경에 나오는 용어는 아니지만 중세 때 유대교 신비주의에서는 자주 사용이 되었다네."

  폴은 선지자 이사야와 닮은 그 수염 사이로 계속 말했다. "단어의 뜻은 그렇고, 이야기는 이래. 이야기의 배경은 유대인이 바벨론에서 포로 생활을 마치고 돌아오던 시기의 예루살렘이야. 바벨론이 예루살렘과 위대한 솔로몬의 성전을 파괴했지. 그런데 나중에 페르시아의 왕 고레스가 바벨론을 정복하고는 유대인들이 자기들 땅으로 돌아갈 수 있게 해주었어. 그리고 관대하게도 파괴된 성전을 다시 지을 수 있는 재정도 마련해 주었지. 희망이 부풀어 오르던 때였어. 이방 문화에서 이방 신과 함께 살았던 오랜 세월의 유린과 고통이 끝나고 이제는 자신들의 땅에서 다시 하나님을 예배하고, 다시 한 번 그 신성한 구역으로 들어가 여러 겹의 기억들이 쌓인 곳에서 하나님을 섬길 수 있게 된 거지. 

  여기까지는 자네도 다 아는 이야기야. 하지만 카렌과 자네 회중에게,  그리고 특히  그 교회를 떠난가정에게 해줘야 하는 이야기는 이거야. 처음 유배에서 돌아온 사람들은 재건된 성전을 보고 울었어. 500년 동안 하나님 백성의 삶에 영광스런 중심이 되었던 솔로몬의 성전이 그들에게는 마치 타르 종이로 만든 판잣집 같아 보이는 건물로 대체되었던 거야. 궁상스러워 보이는 대체물에 그들은 마음이 아파서 울었지. 그들이 울고 있는데 눈부신 빛의 현존인 쉐키나가(하나님의 개인적인 현존이) 내려와서 그 소박하고, 보잘것없고, 가건물 같고, 영광스러웠던 성전에 비하면 안쓰럽기 그지없는 성전을 가득 채웠어. 그들은 손을 들고 찬양했지. 이제 정말로 집으로 돌아온 것 같았어. 하나님이 정말로 그곳에 계시는 것 같았지. 쉐키나는 서서히 사라졌지만 영광은 남아 있었어. 

  자네나 나 같은 사람에게는 이 쉐키나의 이야기가 필요해. 그리고 우리 회중에게도 우리가 회중을 이끌기 위해서 하는 대부분의 일은 사람들이 기대하는 것과 전혀 다르게 보이거든" (폴의 회중은 전혀 회당 같아 보이지 않는, 자동차 세 대가 들어가는 차고에서 예배를 드렸다.)

  "그리고 말인데, 유진, 자네도 목사 같아 보이지가 않아. 너무 어려 보이거든. 수염을 기르면 좀 나을지도 몰라. 어쨌거나 카렌과 자네 회중에게 쉐키나 이야기는 꼭 들려주게."

  나는 수염도 기르고 그 이야기도 들려주었다. 

- 유진 피터슨, <유진 피터슨>, 16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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