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기 싫은 책과 문장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 하느냐: <참사람> 1-2부를 읽으며

habiru 2020. 9. 3. 23:31

일찍이 신학과에 진학하고 싶었지만, 운명의 장난 아닌 장난(?)으로 철학과에 진학했던 나로서는 처음으로 신학 과목을 수강했던 때를 잊을 수 없다. 경건한 자세로 앉아 필기구를 손에 움켜쥐고 하나님의 조명을 사모하던 나는 강사의 호흡 한마디 한마디에 집중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점점 수업을 들으며 나는 그를 의심하게 되었고, 은밀히 증오하며 결국엔 자유주의 신학자로 그를 단정하게 되었다. 그렇게 어찌어찌 학기는 마무리되었지만 수업을 들은 후, 문득문득 찾아오던 혼란과 의심에서 나는 헤어나올 수 없었다.

[자유주의 신학자(?)에 의해] 있던 신앙마저 사라지게 만든 ‘숨겨진 기독론’! 이놈의 불순한 사상을 정화시키기 위해 걸핏하면 나는 애꿎은 마귀를 들먹이곤 했다. “나싸레th 예쑤의 이름으로 명하나니 미혹하는 마귀야 떠나가라!” 어떻게 전지하신 하나님께서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조차 모를지, 도무지 나로서는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이다. 소크라테스도 자기 자신의 영혼에 대해 알았건만, 하물며 예수께서 모를까 보냐! 그러나 이 모든 외침은 초조한 심정을 감추기 위한 자기 기만에 불과했다.

얼마 전부터 월터 윙크(Walter Wink)의 <참사람: 예수와 사람의 아들 수수께끼>를 읽으며 새록새록 그때가 생각났다. 윙크의 책을 읽으며, 홍안(紅顔)의 예수께서 내게 물으시는 것을 상상해 봤다.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 하느냐? (...)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마 16:13-15)” 메시아 예수에게만 집중하던 시선을 돌려 “인자(Son of man)”라는 단어를 유심히 살피게 된 것이다. 금세 예수 자신에 대한 배타적 지칭이 아닌, 보통명사로서 “사람의 아들”에 대해 그다지 진지하게 생각한 적이 없었음이 발각되었다. 더 나아가 “사람(됨)”에 대해 전혀 아는 것이 없다는 점에 놀랄 수밖에! 신학뿐 아니라 인간학에 대해서도 부정의 길(via negativa)이 요구되는 것일까!? “사람(됨)”에 대한 부정적 진술을 통해 비로소 “사람(됨)”의 신비를 인정하고, 직관을 통해 참사람이신 예수를 바라볼 수 있게 되지 않을런지 스쳐 가는 생각을 붙잡을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나는 “사람은 무엇인가”가 아닌,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를 물었던 미가와 톨스토이를 신비주의자로 내심 확신하게 되었다(미 6:8).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 하느냐?(마 16:13)” 당분간 윙크의 책을 읽으며 사람(됨)에 대해 고민할 것만 같다.